육신전(六臣傳)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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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육신전 |
한글표제 | 육신전 |
한자표제 | 六臣傳 |
분야 | 전기서 |
유형 | 한문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성낙수 |
저편자 | 남효온 |
권책수 | 1책 |
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육신전(六臣傳) |
조선 전기에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사육신의 전기.
개설
『육신전(六臣傳)』은 조선 전기에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사육신의 전기다. 저자의 『추강선생문집(秋江先生文集)』 권8과 조기영(趙基永)의 『생육신문집(生六臣文集)』 권7에 수록되어 있다. 『추강선생문집』에는 ‘육신전’ 외에도 계유정란 때 세조를 따르지 않았던 허후(許詡)의 전(傳)도 남기고 있어, 시사해주는 바가 있다.
『육신전』은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 순으로 한 사람씩 전을 기록한 뒤에 마지막에 찬(贊)을 붙였다. 각 인물의 성격이 잘 표현되어 있으며, 특징적인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일화를 곁들이고 있다. 박팽년은 단종이 폐위되자, 경회루 못에 빠져죽으려 하였다. 그러자 성삼문이 후일을 도모하자며 말린 일을 기록하였다. 성삼문은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禪位)하자 옥새를 안고, 통곡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하였다. 세조는 왕위에 오른 뒤에 하위지를 예조참판으로 삼았다. 하위지는 녹을 먹기를 부끄러워하여, 한 방에 쌓아 두었다 한다.
무인이었던 유응부는 단종 복위계획이 발각된 뒤에 세조가 무사를 시켜, 그의 살가죽을 벗겼으나 굴하지 않았다. 그는 성삼문 등을 돌아보며, “사람들이 서생(書生)과는 일을 꾀할 수 없다더니, 과연 그러하구나.”라며 탄식하였다고 한다. 또한 불에 달군 쇠로 단근질을 하여도, 낯빛을 변하지 않으며, “이 쇠는 식었으니 다시 달궈오라.”며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비장미가 넘치게 서술하고 있다.
사육신의 행적을 모두 서술한 뒤 남효온은 찬을 통하여, “누가 신하가 못되리오마는, 지극하도다, 여섯 분의 신하됨이여! 누가 죽지 않으리오마는, 크도다, 여섯 분의 죽음이여!”라며 신하로서의 의리를 지킨 육신들의 절개를 높이 평가하였다.
『육신전』은 당시 상황에서는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 육신들의 행적을 야인(野人)의 입장에서 기록함으로써, 민간의 구비전승과 그 맥을 같이하는 기록물이다. 정사(正史)에서 배척됨으로써 자칫 매몰될지도 모르는 그들의 행적을 남효온이 뛰어난 문장력으로 기술한, 역사의식과 문학성이 결합된 작품이다.
서지 사항
1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필사본이다. 크기는 세로 30.4cm 가로 20.4cm이며, 국입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사육신(死六臣)은 1456년(세조 2년)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 6명을 가리킨다. ‘병자사화(丙子士禍)’라고도 불리는 당시의 사건에서 이들 외에 권자신(權自愼)ㆍ권저(權著)ㆍ김문기(金文起)ㆍ박중림(朴仲林)ㆍ박기년(朴耆年)ㆍ박대년(朴大年)ㆍ박인년(朴引年)ㆍ박쟁(朴崝)ㆍ성승(成勝)ㆍ성삼고(成三顧)ㆍ송석동(宋石同)ㆍ심신(沈愼)ㆍ윤영손(尹令孫)ㆍ이유기(李裕基)ㆍ이의영(李義英)ㆍ이호(李昊)ㆍ이휘(李徽)ㆍ조청로(趙淸老)ㆍ최득지(崔得池)ㆍ최사우(崔斯友)ㆍ최치지(崔致池)ㆍ허조(許慥)ㆍ황선보(黃善寶) 등 70여 명이 모반 혐의로 처형되거나 유배되는 등 화를 입었다.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은 단종에 대한 충심과 함께 왕권 강화를 꾀한 세조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대체로 세종 때에 설치된 집현전(集賢殿) 출신의 유학자들로 문종의 즉위 이후 대간(臺諫)으로 조정에 진출했으며, 신권(臣權)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여론정치를 지향하였다. 세조가 1455년 단종에게 양위(讓位)를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오른 뒤 의정부서사제도(議政府署事制度)를 폐지하고, 6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실시하는 등 왕권의 전제화를 꾀하자 이들은 단종을 복위시키고 관료지배체제를 실현하려 했다. 이들은 1456년(세조 2) 6월 창덕궁에서 명나라의 사신을 맞이하는 자리에 성승ㆍ유응부ㆍ박쟁이 임금을 호위하는 별운검(別雲劍)으로 참여하게 된 것을 이용해, 세조 일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려 했으나, 연회 장소가 좁아 별운검이 들어가지 못하게 되자, 거사를 뒤로 미루었다. 그러나 성삼문을 통해 이들의 계획을 알게 된 김질(金礩)이 장인인 정창손(鄭昌孫)과 함께 세조에게 이 사실을 밀고하면서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계획을 주도한 성삼문ㆍ이개ㆍ하위지ㆍ박중림ㆍ김문기ㆍ성승ㆍ유응부ㆍ윤영손ㆍ권자신ㆍ박쟁ㆍ송석동ㆍ이휘 등은 1456년 7월 10일(음력 6월 8일)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조정의 신료(臣僚)들이 모두 입회한 상태에서 수레로 찢겨, 죽임을 당하는 거열형(車裂刑)을 당했고,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집에서 아내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들의 친자식들도 모두 목을 매어 죽이는 교형(絞刑)에 처해졌으며, 집안의 여성들은 노비가 되었고, 가산도 모두 몰수되었다.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 당시 모반 혐의로 처형되거나, 목숨을 끊은 사람은 70여 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 6명을 특별히 ‘사육신(死六臣)’이라고 기리게 된 것은, 이른바 ‘생육신(生六臣)’ 가운데 한 명으로 여겨지는 남효온(南孝溫)이 『추강집(秋江集)』에 수록된 ‘육신전(六臣傳)’에서 이들 여섯의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긴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사육신은 충절(忠節)을 상징하는 인물로 숭배되었고, 사대부들은 그들의 신원을 조정에 요구하였다. 그 결과 성종 때에는 그들의 후손도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금고(禁錮)된 것을 풀어 주었으며, 숙종 때인 1691년에는 사육신 6명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지어 이들의 위패를 안치하였다.
참고문헌
- 신상필, 「사건(事件)의 기록(記錄)과 한문학(漢文學) ; 사실의 기록과 “전(傳)” 양식의 새로운 가능성-「유연전(柳淵傳)」을 중심으로-」, 『동방한문학』 39권, 동방한문학회, 2009.
- 유하정, 「남효온의 육신전 시비」, 『유학과 현대』 제7집, 박약회대구지회, 2006.
- 윤근호, 「16~18세기 '단종복위운동' 참여자의 복권 과정 연구」, 『사학연구』 제83호, 한국사학회, 2006.
- 이윤정, 「18세기 ‘단종제신’ 포장의 확대와 ‘생육신’의 성립」, 『역사문화연구』 제36집, 한국외국어대학교역사문화연구소, 2010.
- 장영희, 「남효온(南孝溫) 산문(散文)에 나타난 이념의 지향과 『육신전(六臣傳)』의 의미」, 『한문학보』 29권, 우리한문학회,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