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留學生)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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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유학생 |
한글표제 | 유학생 |
한자표제 | 留學生 |
상위어 | 학부(學部), 학무국(學務局) |
관련어 | 시찰단(視察團), 문명개화(文明開化), 개화파(開化派), 관비유학생(官費留學生) |
분야 | 교육·출판/인적구성원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대한제국기 |
왕대 | 조선후기~대한제국기 |
집필자 | 한철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유학생(留學生) |
조선이 개항 후 부국강병을 목적으로 서구의 근대적 제도와 문화를 배우기 위해 외국에 파견한 학생.
개설
19세기 말 동아시아는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국가적 위기를 맞이하자 서둘러 부국강병을 이룩하기 위해 서구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근대적인 학문과 제도 및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힘썼다. 조선도 서양의 종교에 대해서는 강렬하게 거부하면서도 서양의 우월한 무기와 제도 및 기술을 받아들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를 위해 먼저 일찍이 서양에 문호를 개방했던 청국과 일본에 유학생을 파견하였고, 그 후 미국, 프랑스, 러시아를 위시한 서양과 조약을 체결한 뒤에 미국에 유학생을 보냈다. 그러나 조선의 유학정책은 계획적으로 추진되지 못한 데다가 국내의 정치 변화와 재정 부족 등으로 파견과 중단을 반복하며 파행적으로 이뤄졌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880년대에 들어 조선 정부는 부국강병과 개화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다. 이 통리기무아문의 운영과 개화 정책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1881년(고종 18) 일본과 청국에 조사시찰단과 영선사를 각각 파견하였다. 그 일행 가운데 윤치호와 유길준 등은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되어 근대적 학문과 기술을 익힘으로써 개화 정책을 펼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 영선사김윤식은 학생과 공장(工匠)들을 이끌고 중국 천진에서 근대식 무기 제조 기술과 군사 훈련법을 배웠다. 학생들의 근대 기술에 대한 기본 지식의 부족과 정부의 재정 지원 미흡으로 기술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1년 만에 돌아왔지만, 이를 계기로 서울에 근대식 무기 제조 공장인 기기창이 세워졌다.
조직 및 역할
김옥균 등이 주축이 된 개화당은 일본에 적극적으로 유학생을 파견하였다. 1882년 김옥균이 일본을 처음 방문할 때 수행원들이었던 변수, 김용원, 신복모 등을 유학시켰고, 수신사박영효도 학도 10여 명을 데리고 갔으며, 1883년(고종 20) 신문 간행을 위해 초빙되었던 우시바 타쿠조[牛場卓藏] 등이 귀국 시 서재필 등 유학생 17명을 동행케 하였다. 1883년 김옥균은 세 번째로 일본에 갈 때에도 유학생과 동행하였다. 이렇게 파견된 유학생 수는 1883년 말에 50여 명이나 되었다. 또한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대한 답례로 1883년 미국에 파견된 보빙사(報聘使) 일행 중 유길준은 홀로 남아 담마학원(Dummer Academy)에서 유학하였다.
변천
개화당의 유학생 파견은 민씨 척족의 견제로 말미암아 제대로 결실을 보지 못하다가 결국 갑신정변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 후 유학생의 파견은 갑오개혁 중인 1895년(고종 31) 2월 홍범(洪範) 14조에 따른 교육입국조서(敎育立國詔書)가 반포되면서 재개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해 4월 내부 대신박영효는 전국 각도에서 일본 유학생을 선발하라는 훈령을 내렸고, 그 결과 발탁된 114명이 동경의 경응의숙(慶應義塾, [게이오의숙])에 입학하였다. 이어 정부는 유학생 파견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지만, 재정 빈곤으로 말미암아 유학생들의 학비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유학생들 일부를 소환하는 조치를 내림으로써 유학생 파견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후 러일전쟁 중인 1904년 10월 정부는 황실 자금을 이용한 관비 일본 유학생 50명을 선발하여 파견하였다. 여기에는 기존 관비유학생으로 유학 중인 4명도 포함되었다. 이들 관비유학생은 경성부립제일중학교의 특설 한국위탁생과에서 일본어를 비롯하여 근대적인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고, 관비유학생들은 제일중학교 교장이 자신들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자 4개월간 동맹휴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을사늑약 이후 통감부는 일본외무성 관리를 통해 관비유학생의 관리 감독을 강화시켰으며, 1907년(광무 11) 3월 ‘학부소관 일본국 유학생 규정’을 만들어 관비유학생뿐만 아니라 급증하는 사비유학생까지 통제하였다. 통감부는 관비유학생의 결원이 생기면 보충하지 않았고, 1909년(융희 3)에 들어 관비유학생을 선발하여 고등실업교육을 시키는 정도였다. 한국을 식민체제로 전환시켜 가는 와중에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을 길러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1910년 일제의 한국병탄 전후로 귀국했던 관비유학생은 일부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식민권력의 하층 지배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참고문헌
- 『구한국외교문서(舊韓國外交文書)』
-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 한철호, 『한국근대 주일한국공사의 파견과 활동』, 푸른역사, 2009.
- 박찬승, 「1904년 황실 파견 도일유학생 연구」, 『한국근현대사연구』51, 2009.
- 송병기, 「개화기 일본유학생 파견과 실태(1881-1903)」, 『동양학』16, 1988.
- 이계형, 「1904~1910년 대한제국 관비 일본유학생의 성격 변화」, 『한국독립운동사연구』31, 200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