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지도(琉球地圖)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시대 일본 규슈와 중국, 타이완 사이에 있는 오키나와 섬을 중심으로 한 유구 왕국을 그린 지도.

개설

100여 년 동안 세 나라로 나누어져 있던 유구제도를 1429년 중산국(中山國)이 통일하여 유구국을 건국하였다. 1609년 쓰시마번의 침공을 비롯하여 왜구의 침략을 자주 받았으며, 1879년 일본에 의해 오키나와현으로 강제 병합되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1389년(고려 공양왕 1) 유구에서 사신을 보내왔고, 고려에서도 답방 사절을 보냈다. 1390년(고려 공양왕 2)에도 신하국이라 일컬으며 고려에 사신을 보내 왜구에 잡힌 고려인을 쇄환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조선 건국 이후 태조대부터 중종대까지 지속적으로 사신 왕래가 있었으며, 이후에는 공식 기록이 거의 없지만, 표류 조선인을 쇄환하거나(『중종실록』 25년 10월 8일) 중국 사행을 통해 태화전 조회 등에서 유구국 사신과 조선 사신이 조우한 기록이 여러 차례 기록되었다(『숙종실록』 8년 3월 20일).

내용 및 특징

유구국 지도가 조선에 전해진 것은 1453년(단종 1)에 유구국 사신으로 조선에 온 승려 도안(道安)에 의해서였다. 도안이 가져온 지도는 일본과 유구국 두 나라 지도를 필사한 4벌로 족자로 장황하여 1벌은 궐내에 들이고, 나머지는 의정부, 춘추관, 예조에 나누어 보관하였다(『단종실록』 1년 7월 4일). 이 지도는 1482년(성종 13)까지도 족자 형태로 관부에 보관되어 있었다(『성종실록』 13년 2월 13일).

1462년(세조 8) 선위사(宣慰使)이계손(李繼孫)이 「유구국도」에 의거하여 유구국 사신에게 유구에서 일본 사이의 섬 이름과 지명, 조선에서 유구국이 위치한 방향 등을 질문했는데, 당시 「유구국도」는 1453년에 도안이 들여온 것으로 지도의 정확성을 파악하기 위해 탐문한 것으로 보인다(『세조실록』 8년 2월 28일).

1. 신숙주, 『해동제국기』 내 「유구국지도」

『해동제국기』는 1443년 통신사의 제술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신숙주(申叔舟)가 1471년(성종 2)에 성종의 명을 받아 저술한 것으로 여기에 유구국의 역사, 풍속, 도로 등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이 책에 삽입된 6장의 지도 중 일본국과 유구국을 그린 「해동제국총도(海東諸國總圖)」와 유구국만 그린 「유구국지도」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중 「유구국지도」는 1453년에 유구국 승려 도안이 가져온 지도를 바탕으로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오키나와 섬을 중심으로 동북에서 서남향으로 길게 이어진 유구제도를 그렸다. 지도의 화면이 사각형으로 제한되어 유구국 수도가 있던 오키나와 섬을 가장 크게 그리고 20여 개의 부속 섬을 주변에 작게 배치하였다. 지도의 내용만으로는 섬의 크기와 거리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수도인 오키나와 섬과 인근 섬까지 거리를 리(里) 단위로 자세히 적었으며, 산맥과 포구, 성도 자세히 기록되었다.

2. 목판본 소형 여지도책 속 「유구국지도」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선 전도와 도별도 8장 등 총 9장의 지도가 수록되었다. 이후 16세기 후반부터 지도 9장만 수록한 소형 지도책이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17세기에 들어오면서 조선에서만 발견되는 원형천하도와 간략한 중국 전도,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 포함된 지도를 편집한 일본 지도와 유구국 지도 등 4장이 추가되어 총 13장의 지도로 이루어진 목판본 소형 여지도책이 간행되어 유행하였다. 18세기와 19세기에도 다양한 유형으로 변형되어 간행본과 필사본 수백 종이 전해지고 있어 조선후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목판본 소형 지도책에 그려진 「유구국지도」의 지형은 『해동제국기』 속의 「유구국지도」와 유사하지만, 각 섬에 기록된 거리 정보는 거의 생략되었다. 또한 오키나와 섬의 지리 정보도 생략되었고 반복된 모사 과정에서 정보의 오류도 발견된다.

참고문헌

  • 사람들 편, 『규남 하백원의 지도』, 사람들, 2013.
  • 이찬, 「해동제국기의 일본 및 유구국지도」, 『문화역사지리』, 문화역사지리학회, 199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