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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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世宗)이 지은 악장체의 불교 찬가.

개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은 세상을 떠난 어머니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기리기 위하여 1447년(세종 29) 세조(世祖)가 작성한 『석보상절(釋譜詳節)』을 보고, 세종이 석가모니의 공덕을 칭송하여 시의 형식으로 노래를 지어 한데 묶은 것이다. 한글로 표기된 운문으로서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다음으로 오래된 작품이며, 종교성과 문학성을 조화시킨 장편 불교서사시라 할 수 있다.

편찬/발간 경위

1446년(세종 28) 3월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고인의 명복을 비는 의미에서 아들 당시 수양대군(首陽大君)이던 세조에게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한문으로 엮은 『석가보(釋迦譜)』를 기초로 『석보상절』을 한글로 마련하게 했다. 다음해인 1447년 7월 산문으로 된 『석보상절』이 완성되자, 세종은 이를 보고 직접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시의 형식으로 읊은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고 전한다.(『세조실록』 14년 5월 12일)

서지 사항

총 3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자소에서 간행하였다. 세로 29.1cm, 가로 20.9cm이고, 지질은 한지이다.

현재 원간본은 영본으로 상·중·하 3권 3책 중 상권 1책만 대한교과서주식회사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책이 단독으로 중간된 일은 없다.

구성/내용

『월인천강지곡』에 실린 노래의 총 곡 수는 상·중·하 3권에 583권이다. 이 책은 『용비어천가』와 거의 같은 시기에 한글을 사용하여 창작한 문학작품으로 노래의 형식도 비슷하다. 그러나 『월인천강지곡』에는 한시가 부기되어 있지 않고 국문을 큰 활자로 먼저 적고 한자는 작게 달았으며, 해설에 해당하는 『석보상절』도 국문으로 적었다. 국문문학의 영역을 확보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용비어천가』에서는 영웅의 세계를 그리기 위해 일상성을 배제하려 했으나, 『월인천강지곡』에서는 영웅의 세계를 능가하는 상상을 일상생활의 모습과 함께 나타냈다.

이 책은 나중에 『석보상절』과 함께 합편되어, 『월인석보』로 간행되었다.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대조해 보면, 글 쓰는 방법에 있어서 한자(漢字)와 독음의 위치 변경, 한자음 종성(終聲)에서의 ‘ㅇ’을 사용하지 않은 것들을 알 수 있다.

『월인천강지곡』은 석가의 전생에서부터 도솔천에 하강하여 왕자로 태어나 성장[生長]하고, 화려한 결혼생활을 하면서 인생에 대한 번민으로 출가, 수도하여 불도를 깨치고, 장엄한 권능으로 중생을 교화, 제도하다가 열반하여 그 전신 사리를 신중[女僧]들이 봉안하고, 믿고 받들기[信仰]까지의 전 생애를 소설적인 구조로 서사화하였다. 불교의 심오한 진리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키고 석가의 인격과 권능을 신화적으로 미화함으로써, 이 작품은 영웅의 일생을 찬탄하는 전형적인 서사시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월인천강’이라는 명칭 자체도 부처의 공덕을 칭송한 것으로서, 『월인석보』 권1의 첫머리에 “부톄 百億世界에 化身야 敎化샤미 리 즈믄 매 비취요미 니라.(부처가 백억세계에 화신하여 교화하심이 달이 천 강에 비치는 것과 같으니라)”라고 한 주석에서 보듯이, 곧 부처의 본체는 하나이지만, 백억 세계에 화신으로 나타나서 중생을 교화하시는 것이 마치 달이 하나이지만, 시공(時空)을 초월해서 수많은 강에 비치는 것과 같다는 의미에 말미암은 것이다.

별곡계통의 악장체를 집대성한 거작으로 자리를 굳혔고, 『용비어천가』와는 달리 일관된 서사성을 지님으로써 시가문학사상 중요한 구실을 하여 왔다. 곧 이 작품은 ‘이야기체 노래’로서 가사(歌辭)의 기본 형태를 나타내고 있으며, 가사문학의 형성과정에서 한시 계통의 가사 구조로부터 본격적인 가사에 이르는 중간에 자리하여 그 맥락을 이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국어사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월인천강지곡』은 한자말 표기에 있어서 한글을 주로 하고, 한자를 종으로 표기한 최초의 문헌이다. 이 한글 위주의 체재는 한자를 먼저 놓고, 한글을 그 아래에 달아놓은 『석보상절』의 한자말 표기나 『월인석보』 중에서 『월인천강지곡』 부분과 대조적이어서 한글을 존중한 세종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둘째, 훈민정음으로 쓰여진 중세국어의 문헌자료들은 대부분 음소적 표기를 따르고 있는 반면에, 『용비어천가』처럼 『월인천강지곡』은 ‘낱’, ‘앒’, ‘’ 등과 같이 형태음소적 표기를 따르려는 노력이 나타나고 있다.

셋째, 사잇소리의 표기는 모두 ‘ㅅ’으로 통일되어 있으며, 한자음 표기에 있어서도 음가(音價) 없는 종성에 ‘ㅇ’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이다. 같은 중세국어의 문헌자료이지만, 『석보상절』 이후의 문헌에서는 『동국정운(東國正韻)』식 한자음 표기의 한 특징으로서, ‘子 ’와 같은 환경에서 종성에 ‘ㅇ’을 사용하였다.

넷째, 중성(中聲)의 자형(字形)에 있어서도 ‘ㆍ’, ‘ㆎ’의 경우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점이 한글 자형의 변천을 아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한편, 활자는 『석보상절』과 똑같이 갑인자(甲寅字)인 한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와 함께 쓰인 한글 활자를 포함하여 서지학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석가모니의 일대기는 수많은 불교 경전에서 거듭 다루어졌고 노래로 지어 부르는 전통도 거듭 시도되었으나, 이 책에서는 한시가 아닌 우리말로 창작함으로써 새로운 느낌이 나게 개작되었고, 불교문학이 국문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또한 이 작품은 『월인석보』에 이르러 불교계 강창문학(講唱文學)의 대본이 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보아 상절부(詳節部)는 강설하는 부분이고, 월인부는 가창하는 대목으로 되어 있어서, 이것이 강창문학의 표본이라면 국문학의 소설사 내지 희곡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

  • 『세조실록(世祖實錄)』
  • 김석득, 『우리말연구사』, 정음문화사, 1983.
  • 김영배, 『월인석보 제25 해제』,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9.
  • 김윤경, 『한국문자급어학사』, 동국문화사, 1954.
  • 박병채, 『논주 월인천강지곡』, 정음사, 1974.
  • 박종국, 『한국어 발달사』, 세종학연구원, 1996.
  • 최현배, 『한글갈』, 정음사,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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