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후(遠侯)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원후 |
한글표제 | 원후 |
한자표제 | 遠侯 |
상위어 | 과녁, 포후(布侯) |
관련어 | 중후(中侯), 근후(近侯) |
분야 | 정치/군사·국방/병기 |
유형 | 물품·도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최형국 |
용도 | 활쏘기 과녁 |
재질 | 포(包)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원후(遠侯)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조실록』 10년 9월 5일 |
무과 시험의 첫 번째 시험인 목전의 과녁으로 활용된 사각형 천으로 된 목표물.
개설
원후(遠侯)는 무과 시험의 첫 번째 실기 시험인 목전(木箭) 혹은 박두(樸頭)를 쏠 때 사용한 과녁을 말한다. 무과 시험에서 가장 먼 거리인 240보(步)에 설치하였고, 원후의 가운데에 있는 사각형 안에 돼지 머리[豕首]를 그려 넣었다. 원후 시험은 정확도뿐만 아니라 화살의 비거리를 측정하여 목표물을 넘어가면 점수를 더 주었다. 이 때문에 원후를 중심으로 좌우와 뒤쪽에 깃발을 세워 보조 표적으로 삼았다.
연원 및 변천
무과 시험의 첫 번째 실기 시험에 사용한 과녁을 원후라 하는데 가장 멀리 있는 과녁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240보 거리에 표적을 세워 나무촉을 사용하는 목전을 쏘았다. 조선초기에는 목전 240보 시험으로 갑사(甲士)를 뽑기도 하였다(『세조실록』 10년 9월 5일). 원후의 크기는 높이와 너비가 1장(丈) 8척(尺)이며, 그 너비를 3등분해서 정중앙에 정곡(正鵠)이라 하여 사방 6척의 사각형 흰색 가죽을 덧대고 돼지 머리를 그렸다. 원후는 가장 먼 거리이기에 원후를 설치한 좌우 50보 거리에 깃발을 세워 표적을 확실히 구분하도록 하였다. 또한 원후의 뒤쪽 90보에도 좌우 70보 거리에 깃발을 세워 표적을 삼았다.
형태
포를 여러 겹 덧대어 화살이 뚫리지 않도록 만들었다. 높이와 너비가 1장 8척의 청색포(靑色布) 사각형이고, 중심인 정곡은 사방이 4척 6촌 정도로 흰색 가죽을 덧대 돼지 머리를 그렸다. 좌우에 기둥을 세워 사방을 기둥에 묶어 사용하였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무과총요(武科總要)』
- 이중화, 『조선의 궁술』, 조선궁술연구회, 1929.
- 임선빈·심승구 외, 『조선전기 무과 전시의 고증 연구』, 충남발전연구원, 1998.
- 심승구, 「조선시대 무과에 나타난 궁술과 그 특성」, 『학예지』10, 2000.
- 최형국, 「조선시대 기사 시험방식의 변화와 그 실제」, 『중앙사론』24, 200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