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재집(圓齋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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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고려 말 문신인 정공권(鄭公權, 1333~1382)의 시문집으로 그의 셋째 아들인 정탁(鄭擢)이 조선 초 1418년(태종 18)에 간행하였다.

개설

고려 말의 문신이자 충신인 정공권 자신이 평생에 지은 시문들을 그의 셋째 아들 정탁이 편집하여 그 사후인 1418년에 간행한 정공권의 시문집으로, 저자의 문학적인 소양을 짐작하게 해준다.

편찬/발간 경위

이 책의 저자 정공권은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초명이 정추(鄭樞)이며, 자는 공권(公權)인데, 뒷날 자를 이름으로 썼다. 호는 원재(圓齋)이고,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정포(鄭誧)의 아들이다. 그는 1353년(공민왕 2)에 급제하고, 사간으로 정언 이존오(李存吾)와 더불어 신돈(辛旽)이 무엄하게 임금과 나란히 호상(胡床)에 앉고, 대궐에 말을 타고 출입하며, 정권을 전제하여 임금을 업신여기고, 기강을 문란케 하니 축출하라는 내용으로 극렬하게 공박하는 상소를 올린 이유로 하옥되었다. 이 때 사주(使嗾)한 자를 국문하였으나, 공이 “임금이 정사를 옳지 못한 사람에게 맡겨 사직이 위태롭게 되어, 간관의 직책으로 묵과할 수 없는 일인데, 어찌 남의 사주를 받겠는가?”라고 하였다.

신돈이 사람을 시켜, 만약 경복흥(慶復興)과 원송수(元松壽)를 관련시키면 살려 준다고 유혹했으나, 끝내 지조를 굽히지 않으니 죽이려 하였다. 국문관인 이색(李穡)이 이춘부(李春富)에게, “조종(祖宗)이래로 간관을 죽인 예가 없는데, 만약 죽이면 영상의 명예가 불미스럽게 된다.”고 하니, 이춘부가 신돈에게 말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고, 동래현령으로 폄관(貶官)하였다. 1371년(공민왕 20) 5월에 신돈이 역모로 처형된 후 소환되어, 좌간대부(左諫大夫)예문관 직제학(直提學)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었다. 1375년(우왕 1) 수성익조공신호(輸誠翊祚功臣號)를 하사받았으나, 9월에 병으로 사직하였다. 1381년(우왕 7) 중대광진현관대지학(重大匡進賢館大提學)에 비준(批準)되고 청원군(淸原君)에 봉하여졌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서지 사항

2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크기는 19.5×29.5cm이며,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 책은 고려 말 문신인 정공권의 시문집으로, 1418년(태종 18)에 아들 정탁이 편집, 간행하였다. 시(詩)의 ‘문왜적파강화군달조불매작와야명이서회(聞倭賊破江華郡達朝不寐作蛙夜鳴以敍懷)’는 1360년(공민왕 9) “왜적이 강화를 격파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는 내용이며, “경신추왜적분상주함함양성장입두류산...(庚申秋倭賊焚尙州陷咸陽城將入頭流山...)”은 1380년(우왕 6) 왜적이 상주와 함양을 함락하고, 두류산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이성계가 운봉의 인월역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개선한데 대하여 축하한 내용으로, 그의 우국충정이 잘 나타나 있으며, 사료적 가치가 있는 자료이다. 명잠 중 ‘원재명’은 모가 난 물건은 쉽게 손상된다는 것에 비유하여, 학문도 어느 한 가지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고려 말의 충신인 정공권의 문학적인 소양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 김성환, 「강화도 단군전승의 이해와 인식-문집 자료를 중심으로-」, 『인천학연구』 제8호,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2008.
  • 신양재, 「고려 말 문집에 나타난 아동교육」, 『유아교육연구』 제25권 제6호, 한국유아교육학회, 2005.
  • 엄지웅, 「한중 문화의 교차적 이해 (2)-전겸익의 고려말, 조선초의 역사와 시에 관한 시론-」, 『민족문화연구』 62권,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