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의취(源義就)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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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원의취 |
한글표제 | 원의취 |
한자표제 | 源義就 |
동의어 | 전산의취(畠山義就) |
관련어 | 응인(應仁)의 난, 전산전(畠山殿) |
분야 | 정치/외교/사행 |
유형 | 인물 |
지역 | 일본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윤성익 |
이칭(자,호,봉작호,시호) | 아명: 차랑(次郞), 초명: 의하(義夏) |
성별 | 남 |
생년/일 | 1437년? |
몰년/일 | 1490년 |
출신지 | 일본 |
관력 | 이여수(伊予守), 우위문좌(右衛門佐) |
가족관계(부,조,외조[모], 장인[처], 형제) | 부: 전산지국(畠山持國)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원의취(源義就)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조실록』 4년 윤2월 14일, 『세조실록』 6년 5월 15일, 『세조실록』 11년 12월 15일, 『세조실록』 12년 1월 2일, 『성종실록』 5년 7월 3일 |
일본 실정시대 후기의 무장.
개설
전산의취(畠山義就)이다. 전산씨(畠山氏)는 실정막부 장군가인 족리씨(足利氏)의 일문으로 관령(管領)을 맡은 세 집안 중 하나이며, 적류집안은 기내(畿內) 및 그 주변 지역의 수호(守護)를 역임하였다. 조선과의 통교 시에는 본성인 원(源)을 사용하고 전산전(畠山殿)을 칭하였다.
의취는 관령인 전산지국(畠山持國)의 장남으로 초명은 의하(義夏)라고 하였다. 처음 지국에게는 아들이 없어 이복동생인 지부(持富)를 양자로 삼아 가독을 잇게 하려 하였는데, 의취가 태어나 1448년 열두 살에 가문을 물려받았다.
내용 및 특징
이후 전산씨 내에서는 지국·의취를 지지하는 세력과 지부의 아들인 미삼랑(弥三郞)·정장(政長)을 지지하는 파로 분열하였는데, 1454년 지국은 가신들의 반란 계획을 알아차리고 이를 토벌하였다. 그런데 미삼랑이 세천승원(細川勝元)의 원조를 받아 반격하여, 지국은 은퇴하고 의취는 일단 이하(伊賀)로 피하였다. 그러나 곧 의취는 장군 족리의정(足利義政)의 지지하에 경도로 돌아와 미삼랑 세력을 구축하였다. 1455년 지국이 사망하자 산성(山城)·하내(河內)·기이(紀伊)·월중(越中)의 수호직(守護職)과 대화우지군(大和宇智郡)의 영지를 인정받았다. 1459년 미삼랑이 급사하였지만, 그 동생인 정장은 세천승원(細川勝元) 등의 원조를 받아 1460년 장군 족리의정으로부터 전산씨의 가독을 인정받고 1464년에는 관령(管領)에도 올랐다. 이와 동시에 의취는 4개국 수호직에서 파면당하고 막부로부터 쫓기는 몸이 되었다. 그러나 의취는 토벌군에 맞서며 자신의 지지 세력을 결집해 반격에 나서 1466년 정장의 군대를 격파하고 산명종전(山名宗全)의 원조를 받아 경도로 돌아와 장군 요시마사로부터 사면받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서 1467년 관령에서 파면당한 정장이 세천승원의 지지하에 거병하자 의취가 이를 공격해 무찔렀으나 이를 계기로 응인(應仁)의 난이라고 불리는 전국적인 전란으로 확대되었다. 1477년 대란은 거의 종식되었으나 그 후에도 전산씨의 양 세력은 전산씨의 소령을 중심으로 항쟁을 계속하였다. 1490년 의취는 54세로 진중에서 병사하였지만 의취의 사후에도 전산씨의 가독을 둘러싼 다툼은 계속되었다.
활동 사항
전산씨 사신이 조선에 오기 시작한 것은 세조대부터였다(『세조실록』 4년 윤2월 14일). ‘원의취(源義就)’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1460년(세조 6)으로 원의충(源義忠), 즉 전산의충(畠山義忠)과 같이 사신을 파견하였다(『세조실록』 6년 5월 15일). 이때 의충은 의취가 가독을 이은 이후 조선으로 사신을 보내지 않은 것에 대하여 사죄를 대신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생각해 보면 의취는 이때 처음으로 사신을 보낸 것이 됨으로 그 이전 ‘전산전’ 명의의 사신은 의취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 된다. 전산의충(畠山義忠)은 전산씨의 분가인 능동 전산씨의 2대 당주로 의취의 5촌 당숙이며, 전산씨 본가의 가독 분쟁에서는 의취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조선 측의 기록에서는 본가의 당주인 의취보다 의충이 중심인물로 묘사되는 경우가 있어서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는 의충 쪽이 관제(管提: 관령) 집안으로 되어 있다. 아울러 의취를 “의충의 동모제(同母弟) 덕본(德本)의 아들”이라고 하고 있는데 덕본은 전산지국(畠山持國)의 법명으로 의취의 부친인 것은 맞지만 의충과는 사촌지간이었다.
의취를 비롯하여 ‘전산전’을 칭한 사신이 이 무렵 조선에 파견되었지만 이 시기에는 일본 각지에서 오던 사신들 중 종종 가짜 사신인 위사(僞使)가 발각되던 때이기도 하였다. 특히 응인의 난 이후의 혼란 상황에서 위사의 발생은 더욱 늘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전산전의 사절도 별개의 세력이 이들의 명의를 빌리거나 사칭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의취의 사신에 대해서는 1465년(세조 11) 12월(『세조실록』 11년 12월 15일)과 1466년(세조 12) 1월(『세조실록』 12년 1월 2일)의 기사에서 관제라는 직책명을 붙이고 있는데 이 무렵 관령이었던 것은 의취를 몰아낸 전산정장이었고 의취가 반격에 성공하는 것은 그 뒤였다.
또한 1474년(성종 5)의 기록에서 원의취는 ‘옹하기월능(雍何紀越能) 5주 총태수’라는 직책을 칭하고 있는데(『성종실록』 5년 7월 3일), 이는 전산씨가 대화우지군(大和宇智郡)·하내(河內)·기이(紀伊)·월중(越中)·능등(能登)의 수호직을 겸하고 있던 때가 있었기에 이를 반영한 것처럼 보이지만, 정식으로 의취가 이들 지역 모두의 수호직에 오른 적은 없었다.
참고문헌
- 한일관계사학회, 『왜구 위사 문제와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2005.
- 橋本 雄, 『中世日本の國際關係―東アジア通交圈と僞使問題』, 吉川弘文館, 2005.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石田晴男, 『應仁·文明の亂』(戰爭の日本史 9), 吉川弘文館,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