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의준(源義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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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실정시대 전기의 영주로, 구주탐제(九州探題)에 임명됨.

개설

원의준(源義俊)의 본명은 삽천의준(澁川義俊)이다. 삽천씨는 실정막부 장군가인 족리(足利氏)의 일족으로 원(源)은 본성(本姓)이다. 삽천씨도 다른 일본의 통교자들과 마찬가지로 조선과의 통교 시에는 본성을 사용하였다. 부친은 만뢰(滿賴)이다. 관위는 좌근장감(左近將監)이었다.

내용 및 특징

1419년 부친을 이어 구주탐제(九州探題)가 되었다. 이해 조선의 대마도 정벌이 일어나자 이 사실을 막부에 알리고 그 대책에 힘썼다. 1420년 처음으로 조선에 사신을 보내고 이후 적극적으로 조선과의 교섭에 임하였다. 의준은 왜구로 인한 피로인을 조선으로 송환하는 한편 조선의 대마도 정벌 시 조선의 포로가 된 일본인의 환송을 누차 청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이 시기 의준과는 별도로 부친인 만뢰도 여전히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1423년 소이만정(少貳滿貞)이 본거인 박다(博多)를 공격해 이를 맞아 싸웠으나 패배해 축전(筑前)에서 비전(肥前)으로 물러났다. 이 싸움의 패배를 계기로 삽천씨는 급속한 쇠퇴 양상을 보인다. 1425년 소이씨에 반격을 가하였으나 다시 패퇴하여 1428년 구주탐제를 사촌동생인 삽천만직(澁川滿直)에게 물려주고 그 후에는 축후(筑後)에서 은거 생활을 보내다가 1434년 사망하였다.

1425년의 패배 후 대내성견(大內盛見)이 삽천씨를 원조하며 구주 평정에 나서 구주 북부에서 대내씨의 세력이 확대되었다. 이 대내씨의 후원 아래 삽천씨는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는 상태가 되었다. 구주탐제라는 직위는 유명무실해지고 삽천씨는 비전의 일부 지역만을 지배하는 소영주로 전락하였다. 또한 의준의 사후 구주탐제 및 삽천씨는 조선과의 교역에서도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활동 사항

구주탐제 및 삽천씨의 조선통교는 의준의 부친인 삽천만뢰 때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의준의 사신이 처음 조선에 파견된 것은 구주탐제가 된 다음 해인 1420년(세종 2)이었다(『세종실록』 2년 5월 19일). 당시 ‘구주도독(九州都督) 원의준’ 명의의 사신은 ‘전총관(前摠管)’인 부친 원도진(源道鎭)의 사신과 함께 조선에 와서 구주탐제의 교체를 알리고 있다. 이에 대하여 조선은 양자에의 답신에서 앞으로의 일본 통교자들은 ‘반드시 총관공의 서신을 가지고 와야 한다.’는 원칙을 그 전해인 1419년 겨울 일본 측에 전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부친에 이어 의준도 이를 시행하도록 통고하고 있다(『세종실록』 2년 7월 6일). 이는 일본 통교자들에 대하여 일정한 통제가 필요하였던 조선이 그 단속의 일환으로 일본 통교자들의 창구를 구주탐제로 일원화하려 했던 것이다. 이는 구주탐제에 의한 왜인통제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고 조선 측이 판단하였기 때문에 이루어진 결정이었을 것이다. 참고로 의준은 부친 만뢰가 구주탐제에 해당하는 여러 명칭을 사용하였던 것과는 달리 이 이후부터는 주로 ‘구주총관(九州摠管)’의 명의를 사용하였다.

의준은 이후 빈번하게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대마도 정벌로 조선에 억류된 일본인의 송환을 요청하기도 하고 때로는 일본의 다른 통교자들처럼 대장경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또한 공물과 회사를 통하여 실질적으로 조선과 교역을 행하였는데 일본으로부터 유황·동·부채·일본도 등의 일본 국내 생산품뿐만 아니라 소목·후추·침향 등 남해산 물품도 가져왔다(『세종실록』 3년 6월 10일)(『세종실록』 5년 6월 21일 등). 이에 대하여 조선으로부터는 면포·전포·인삼 등을 회사품으로 받아 갔다. 삽천씨와 조선과의 통교는 만뢰·의준 부자뿐만 아니라 이와 동시에 다른 친족이나 배하 가신들 사이에서도 이루어졌다. 만뢰 재임 시에 이어 의준 때에도 원창청(源昌淸, 본명 길견창청(吉見昌淸))·평종수(平宗壽, 본명 판창종수(板倉宗壽))·평만경(平滿景, 본명 판창만경(板倉滿景)) 등은 별도의 사신을 파견해 왔다.

의준을 비롯해 일본 통교자들의 사신이 조선에 도항해서 귀환할 때까지의 비용은 모두 조선 측이 부담하였다. 또한 그들이 가지고 온 물건을 전부 판매하지 못하였다는 이유 등을 들어 조선의 포소에 장기간 체류하는 폐단이 생겨 조선 정부는 그들이 가지고 온 물품을 대신 매매해 주기도 하였다. 게다가 통교자들의 수는 점점 늘어나 이는 결국 조선에게 막대한 재정적 부담이 되었다. 의준의 사신은 1년에도 수차례 파견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조선에서도 이들 사신의 실체가 상인이라고 파악하고 있었다. 때로 이들 중에는 서계 없이 조선에 와 조선이 이들의 수납을 거부했던 일도 있었다(『세종실록』 5년 11월 17일). 이런 문제에 대하여 1424년(세종 6) 의준은 매년 봄가을에 1번씩만 사신을 파견하겠다는 약속을 맺었는데(『세종실록』 6년 12월 17일) 이는 일본 통교자들의 정기 교역선인 세견선(歲遣船)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그렇지만 1423년(세종 5) 5월 박다를 상실한 뒤 삽천씨가 쇠약해지며 조선과의 관계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원의준의 사신 파견은 1425년(세종 7)이 마지막이었다(『세종실록』 7년 1월 6일). 부친 만뢰는 이후에도 사신을 조선에 파견하였지만 이 역시 1429년(세종 11)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 또한 의준의 뒤를 이어 구주탐제가 된 만직 명의의 사신에 대한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1438년(세종 20) 원도진 명의의 사신이 파견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세종실록』 20년 6월 26일) 가짜 사신인 위사(僞使)였을 가능성도 많아 조선과의 통교는 실질적으로 단절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에 만직의 뒤를 이은 교직(教直)이 1451년(문종 1) 사신을 파견하여(『문종실록』 1년 8월 4일) 통교가 재개되지만 이미 삽천씨는 구주의 일개 영주로 전락한 뒤였다. 조선에서의 지위도 마찬가지여서 왜인에 대한 조선의 통제책은 소이씨·종씨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구주에서 세력을 확장해 간 대내씨와의 관계도 더욱 강화되었다.

한편, 대마도 정벌 이후 일본과의 교섭 과정에서 1420년(세종 2) 회례사로 일본에 파견된 송희경(宋希璟)은 3월과 8월 박다에서 만뢰·의준 부자를 만났는데, 그의 『노송당 일본행록(老松堂 日本行錄)』에는 당시 상황과 송희경의 감상을 한시로 전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두 차례 모두 ‘노원수(老元帥) 원의진(源義珍)’과 ‘신탐제(新探提) 원의준(源義俊)’은 날짜를 달리해 각각 송희경 일행을 밤에 방문하였는데 이들이 굳이 밤에 자신들을 만나는 이유에 대하여 송희경은 의아해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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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川添昭二, 「九州探題と日鮮交涉」, 『對外關係の史的展開』,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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