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개(袁世凱)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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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원세개 |
한글표제 | 원세개 |
한자표제 | 袁世凱 |
관련어 | 갑신정변(甲申政變), 대원군(大院君), 대총통(大總統), 무술정변(戊戌政變), 북양군벌(北洋軍閥), 신해혁명(辛亥革命), 임오군란(壬午軍亂), 청일전쟁(淸日戰爭) |
분야 | 정치/외교/외교사안 |
유형 | 인물 |
지역 | 중국/대한민국 |
시대 | 조선/청 |
왕대 | 조선/청 |
집필자 | 김소영 |
이칭(자,호,봉작호,시호) | 자: 위정(慰亭), 위정(慰廷), 호: 용암(容庵) |
생년/일 | 1859년 9월 16일 |
몰년/일 | 1916년 6월 6일 |
출신지 | 하남성(河南城) 항성현(項城縣) |
관력 | 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紮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직례안찰사(直隷按察使), 직례총독(直隷總督), 대총통(大總統) |
가족관계(부,조,외조[모], 장인[처], 형제) | 조부: 원수삼(袁樹三), 부: 원보중(袁保中), 양부: 원보경(袁保慶)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원세개(袁世凱)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고종실록』 19년 9월 23일, 『고종실록』 21년 11월 26일, 『고종실록』 23년 7월 29일, 『고종실록』 31년 5월 1일 |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이자 중화민국 대총통.
개설
원세개는 청말민국(淸末民國) 초의 정치가이자 북양군벌(北洋軍閥)의 지도자였다. 1882년 조선에서 발발한 임오군란을 진압하고 1885년에는 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紮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에 임명되어 조선에 머물렀다. 귀국한 이후에는 천진(天津)에서 신건육군(新建陸軍)을 훈련시켰다. 신해혁명(辛亥革命) 당시 청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를 퇴위시켜 청조를 몰락시켰다. 중화민국(中華民國) 임시 대총통이 되고, 1913년에는 중화민국대총통에 당선되었다. 1914년 중화민국약법(中華民國約法)을 반포하고 다음 해에 스스로 황제에 등극하여 중화제국(中華帝國) 성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황제제 실시에 대한 국내외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황제제를 취소하였다.
가계
원세개의 증조부는 원요동, 조부는 원수삼이다. 부친은 향신 원보중으로 원세개는 그의 넷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숙부인 원보경은 과거에 급제하여 도원(道員)의 벼슬을 지냈는데, 원보경이 아들이 없자 원세개를 양자로 맞이하였다.
활동 사항
원세개는 1876년과 1879년 두 차례 하남 향시에 응시하였지만 낙방하였다. 과거에 실패한 뒤 경군통령(慶軍統領)인 오장경(吳長慶)의 휘하에 들어가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고 영무처(營務處)의 일을 맡게 되었다.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조선 정부가 청에 원병을 요청하자 청 정부는 오장경·정여창(丁汝昌)과 원세개를 조선으로 파견하였다. 오장경과 원세개는 임오군란의 주동자로 지목된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여 청나라로 압송·연금하였고 군란을 진압하였다. 군란 진압 후 원세개는 조선의 군대를 친군영 체제로 개편하는데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고종실록』 19년 9월 23일).
이후 1884년 조선에서 김옥균 등이 갑신정변을 일으키자 원세개는 군대를 이끌고 정변을 진압하였다(『고종실록』 21년 11월 26일). 정변 진압 후 원세개는 이홍장에게 조선에 감국을 두고 조선의 내정과 외교를 대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조선과 일본의 반발을 우려한 이홍장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원세개는 청으로 일시 귀국하였다가 1885년 조러밀약설과 함께 영국이 조선의 거문도를 점령하자 이홍장의 명령으로 다시 조선으로 건너왔다. 원세개는 1885년 11월 21일 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에 임명되어 한성에 주재하게 되었으며, 이 시기부터 조선의 내정 및 외교를 본격적으로 간섭하고 청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다(『고종실록』 23년 7월 29일). 조선 정부의 내정과 외교에 대한 원세개의 간섭이 심해지자, 고종을 비롯한 조선 정부의 청에 대한 반감은 커져 갔다. 원세개 또한 이홍장에게 반청적 입장인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친청적 인물로 새로운 정권을 수립할 것을 건의하는 등 조선 정부와 원세개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청과 일본이 조선으로 동시 출병하여 청일전쟁이 벌어졌다(『고종실록』 31년 5월 1일). 청일전쟁 직전에 병을 핑계로 귀국한 원세개는 이후 직례안찰사(直隷按察使)가 되었고, 천진 부근에서 신건육군을 창설, 이를 북양상비군(北洋常備軍)으로 확장하여 북양군벌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원세개는 1898년 무술변법운동이 일어나자 개혁파에 가담하였으나 곧 그들을 배반하여 정변 계획을 보수파인 서태후(西太后)에게 밀고하여 변법을 좌절시켰다. 원세개는 이 사건으로 서태후의 신임을 획득하여 직례총독(直隷總督)을 대리하게 하였다. 1900년 의화단(義和團)의 난이 일어나자 산동순무에 임명된 원세개는 양광총독이홍장, 호광총독장지동, 양강총독유곤일 등과 함께 난을 진압하고 외국인을 보호하여 열강의 신임을 획득하였다. 1901년 이홍장이 병사하자 그의 뒤를 이어 북양대신 겸 직례총독 대리가 되었고 1902년 정식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원세개는 직속의 신건육군을 증강시켜 독자적인 군사력을 키우며 세력을 형성해 갔다. 원세개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황족들이 그를 견제하기 시작하여, 외무부 상서(尙書), 군기대신(軍機大臣)으로 전보되었다. 이어 1908년 선통제(宣統帝)가 즉위한 뒤 선통제의 생부이자 섭정이었던 순친왕(醇親王)의 명령으로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혁명파에 대적하기 위하여 순친왕이 원세개를 등용하면서 다시 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원세개는 11월 내각 총리대신이 되어 청 정부 내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그는 청의 몰락을 예견하고 혁명군과 협력하기 시작하였다. 1912년 1월 1일 손문(孫文)은 남경에서 임시총통에 취임하여 중화민국의 성립을 선포하였다. 원세개는 손문으로부터 청조를 무너뜨리는 조건으로 초대 총통으로 추대하겠다는 언질을 받고 선통제를 압박하여 퇴위조서를 선포하게 함으로써 청조를 몰락시켰다.
그는 1912년 3월 임시총통에 취임하고 수도를 남경(南京)에서 북경(北京)으로 옮겼다. 또 1913년 3월에는 국민당 당수 송교인(宋敎仁)을 암살하고 같은 해 10월에 정식으로 초대 대총통에 취임하였다. 그는 국민당을 해산시키고 대총통선거법을 개정하여 독재 체제를 확립하였다.
원세개는 총통에 만족하지 않고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었다. 제1차 세계대전 한창 진행 중이던 1915년 5월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받아들이고, 황제 추대 운동을 전개시켜 1916년 1월 황제로 등극하였다. 국호를 중화제국으로 고치고 연호를 홍헌(洪憲)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1915년 운남(雲南) 봉기를 시작으로 반원(反袁) 운동이 전개되고, 영국·러시아·일본 등 주변 강대국도 황제 취소를 권고하자 1916년 3월 황제제를 취소하고 같은 해 6월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원세개전집(袁世凱全集)』
묘소
하남성(河南城) 안양(安陽) 원림(袁林).
참고문헌
- 구선희, 『한국 근대 대청정책사 연구』, 혜안, 1999.
- 권혁수, 『19세기 말 한중 관계사 연구』, 백산자료원, 2000.
- 구선희, 「조선을 근대 식민지로 만들려 했던 중국인, 위안스카이」, 『역사비평』 86, 2009.
- 김정기, 「청의 원세개 파견과 조선군사정책」, 『역사비평』 54,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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