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백영(牛伯英)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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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우백영 |
한글표제 | 우백영 |
한자표제 | 牛伯英 |
관련어 | 예교성(曳橋城) 전투, 정유재란(丁酉再亂), 직산(稷山) 전투 |
분야 | 정치/군사·국방/전쟁 |
유형 | 인물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송양섭 |
이칭(자,호,봉작호,시호) | 호: 소천(少川) |
성별 | 남 |
출신지 | 명(明) 보안위(保安衞) |
관력 | 유격(遊擊)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우백영(牛伯英)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수정실록』 30년 2월 1일, 『선조실록』 31년 3월 29일, 『선조실록』 30년 7월 24일, 『선조실록』 30년 7월 25일, 『선조실록』 30년 9월 9일, 『선조실록』 30년 9월 28일, 『선조실록』 30년 10월 7일, 『선조실록』 31년 2월 3일, 『선조실록』 31년 3월 29일, 『선조실록』 31년 11월 2일, 『선조실록』 31년 12월 14일, 『선조실록』 32년 1월 23일 |
정유재란 당시 조선으로 파견되어 양호와 마귀를 따라 종군한 명나라 장수.
개설
우백영은 명 보안위(保安衞) 사람으로 호는 소천(少川)이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흠차통령계진표하삼둔중우영유격장군(欽差統領薊鎭票下三屯中右營游擊將軍)도지휘첨사(都指揮僉使)로서 1597년 7월 조선에 왔다. 충청도 천안의 직산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고, 이후 안동에 주둔했다가 남원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유정(劉綎)의 휘하에서 순천의 예교성(曳橋城) 전투에 참가했다가 유정이 전투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알고, 교전하지 말도록 권유하였고, 유정은 이에 따라 군대를 물렸다. 1599년 4월에 귀국하였다.
가계
활동 사항
1597년(선조 30) 일본군의 재침으로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명에서는 우첨도어사(右僉都御史)양호(楊鎬)를 경리(經理), 병부 상서형개(邢玠)를 총독(總督), 군문(軍門)마귀(麻貴)를 제독(提督)으로 삼아 조선으로 파병하였다. 우백영이 거느린 군사가 밀운병(密雲兵) 2,000명이라고도 하고(『선조수정실록』 30년 2월 1일), 신흠(申欽)의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과 신경(申炅)의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서는 계주(薊州)의 마병 600명을 거느리고 왔다고도 하는데, 이렇게 인솔 병력의 수가 차이가 나는 것은 맡은 임무가 변화할 때마다 병력 현황도 계속해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1598년(선조 31) 3월, 남원에서 주둔할 때 그의 병력은 1,100여 명이었다(『선조실록』 31년 3월 29일).
우백영은 조선에 들어온 지 한 달이 지나서야 선조의 접대를 받았는데, 그의 직급이 유격으로서 비교적 낮았던 데다가 당시 조선에 들어온 명군 장수가 많아서 순위가 밀렸기 때문이다(『선조실록』 30년 7월 24일)(『선조실록』 30년 7월 25일).
그해 8월, 일본군이 남원성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북진하자 경리양호와 제독마귀는 부총병해생(解生)으로 하여금 이들을 막게 하였다. 이때 우백영은 해생, 참장양등산(楊登山) 등을 따라 남하하여 직산의 소사평(素沙坪)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선조실록』 30년 9월 9일). 일본군의 증원 부대가 결집하면서 명군 장수들은 일시적으로 회군하여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이 전투로 일본군의 북상은 저지되었고, 조선은 어느 정도 안정될 수 있었다.
우백영은 직산 전투 이후 잠시 서울로 올라왔으나 일본군이 여전히 남원·임실 등지에 잔류하고 있었으므로 다시 내려가게 되었다. 이에 선조는 우백영을 방문하여 위로하였다(『선조실록』 30년 9월 28일). 우백영은 이해 10월 7일, 부총병 이여매(李如梅)·참정(參政) 양등산과 함께 남하하였다(『선조실록』 30년 10월 7일).
우백영은 울산의 도산성(島山城) 전투에 참가하였으나 적극적인 태도로 임하지 않았다. 1598년(선조 31) 1월, 도산성 공격이 실패로 돌아간 뒤, 우백영은 부총병이방춘(李芳春)과 함께 안동에 주둔하였다(『선조실록』 31년 2월 3일). 경리양호가 재차 공격을 준비할 때, 제독유정(劉綎)이 이끄는 서로군에 편성되어 남원에 주둔하였다(『선조실록』 31년 3월 29일).
우백영은 유정의 휘하에서 순천 예교성(曳橋城)에 주둔하던 소서행장(小西行長)의 군대를 공격할 때 참가하였다. 우백영은 전공을 세우기는 하였으나, 적극적으로 참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남원의 기생까지 진중에 대동하여 비난을 받았다(『선조실록』 31년 11월 2일) 신흠의 『상촌선생집』에 의하면 그가 제독유정이 적극적인 전투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퇴군을 권유하였다고 한다.
우백영은 1598년(선조 31) 12월, 귀국이 결정되었다. 이는 누르하치[奴兒哈赤]가 몽고와 연합하여 요동(遼東)을 공격한다는 소문이 돌자 총독 형개가 그와 이방춘 등으로 하여금 방어하게 하였기 때문이다(『선조실록』 31년 12월 14일). 1599년(선조 32) 1월, 선조는 우백영과 이방춘 등을 방문하여 예단을 주었다(『선조실록』 32년 1월 23일). 우백영 등은 1599년(선조 32) 4월에 명으로 돌아갔다.
참고문헌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김경태, 「임진전쟁기 강화교섭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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