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득록(愚得錄)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이 책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 1592~1590)의 문집이다.

개설

정개청의 학설은 유학(儒學), 역학(易學), 천문학(天文學), 지리(地理), 산수(算數), 복무(卜巫), 철학(哲學: 형이상학), 약학(藥學), 전진법(戰陳法), 가무(歌舞) 등 차원이 높은 글이 350여 편 수록된 『곤재집(困齋集)』으로 1681년(숙종 7년) 5월 하순 경신(庚申)에 허목(許穆)이 쓴 서문(序文)에 의하면, 334편의 원고가 수록되어 있다고 하였으나, 1692년(숙종 18)에 발간된 『우득록(愚得錄)』에는 총 272편이 수록되어 있어, 10여 년의 당화(黨禍)에 의하여 원고(原稿)가 분실(紛失)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편찬/발간 경위

이 책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 정개청의 학풍과 절의(節義)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쓴 것이다. 정개청의 학풍은 박순(朴淳)을 만나 학문적인 조언을 듣고, 자각의 체험을 거치기 전까지는 박학적 학문태도를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각의 체험을 거친 이후로는 정주학 원전을 숙독하면서 거경궁리를 자신의 학문종지로 받아들였으며, 사색하여 자득한 결과를 『우득록』으로 남겼다.

지금 전하는 『우득록』으로만 볼 때 그의 학문적 탐색은 정주학의 논리와 범위를 거의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정주학과 차별화되는 어떤 독특한 논리나 학설을 찾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학문체계가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정주학의 종지를 철저한 사색과 자득으로 이해하여, 이를 당시 사회에 실천적으로 구현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정개청은 정주학적 구도 속에서 자연세계의 원리와 이념이 인간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길을 모색했던 유학자이다. 그러나 기질을 변화시키지 않고는, 인간에게 내재된 도덕원리를 발현시킬 통로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경(敬) 공부를 기초로 삼아, 기질의 제한과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시공을 초월하여 인간이 실현해야 할 가치의식은 의(義)라고 주장하고, 의(義)와 이(利), 공(公)과 사(私),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구분을 명확히 함으로써 의(義)=공(公)=천리(天理)가 소통되는 열린 사회를 비전으로 제시했다. 나아가 의리와 원칙이 문란해져 가는 세태를 목격하고 좀 더 엄정한 절의(節義)의 실천을 시대정신으로 요구했다가 도리어 절의로 목숨을 잃는 역설을 보여 주었다.

서지 사항

3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인영본(木板影印本)이다. 사주쌍변이고, 반곽은 23.4×16.8cm이다. 10행 18자의 유계, 주쌍행, 내향2엽화문어미를 갖추고 있고, 크기는 31.9×23.0cm이며,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 책의 이름은 곤재라는 자호(自號)에서도 보이듯이 저자가 자신의 저술에 대한 겸사(謙辭)이자, 노력의 결정체라는 의미로서 붙인 것이다. 저자는 생전에 자신의 저작을 자편(自編)하여, 『수수기(隨手記)』 9권과 『우득록』 3권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이 터지자, 모두 적몰(籍沒)되어 선조가 열람을 한 후 돌려주었다. 그중 『수수기』는 도중에 분실되고, 『우득록』만 제자들 사이에서 전사되어 남겨지게 되었는데, 이를 ‘제자사장본(弟子私藏本)’ 혹은 ‘제자본(弟子本)’이라고 한다.

이 책의 간행을 위하여, 저자의 문집을 제일 처음 정리한 사람은 윤선도(尹善道)다. 그러나 간행되지 못했고, 1680년(숙종 6) 저자의 자산서원(紫山書院)이 다시 훼철되자, 허목은 해옹교정본(海翁校正本)에 1681년(숙종 7) 서문과 『곤재선생집(困齋先生傳)』을 지어서 붙이고, 다시 한 번 교정을 보았으나, 역시 간행되지 못하였다. 이른바 저자의 ‘자편수고본(自編手稿本)이 발견된 것은 1688년(숙종 14)경이다. 부록은 ‘곤재선생사실(困齋先生事實)’ 말미에 1703년(숙종 29) 6월 진사(進士) 홍중삼(洪重三)이 편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본집이 간행된 이후에 추각(追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본 문집은 원집 3권, 부록 2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권수에 허목의 서(序)가 있다. 저자의 자편인 권1과 권2는 모두 논학(論學) 90편, 석의(釋義) 27편, 논례(論禮) 23편, 논리(論理) 16편과 서(序), 가(記), 시(詩)이고, 제자들에 의해 편집된 것으로 보이는 권3은 상소(上疏)와 제문(祭文), 서(書)다.

자편고(自編稿)인 권1과 권2는 일반적인 문집 구성과 달리 논학(論學), 석의(釋義), 논예(論禮)와 같이 문체(文體)에 관계없이 그 내용에 따라 분류하는 편찬 방식을 취한 것이 특징이다. 저자가 이러한 방식을 채용한 것은 단순한 문집으로서가 아니라, 일관된 체제를 갖춘 독립된 저술로 편찬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록본(手錄本)의 자주(自註)에 수정을 기약하고 있으며, 미처 제목을 정하지 못하여 무제(無題)라고 한 글도 보이듯이 완성된 체제를 갖추지는 못했는데, 이는 저자가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연루되어 사망함으로써 정리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각 주제 내에서 작품의 편차는 대략 저작 시기순이지만, 권1의 논학(論學)은 이중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시기를 확인할 수 있는 대부분의 저작이 대체로 1576년(선조 9)부터 1581년(선조 14) 사이의 것인데, 논학의 경우는 처음부터 『동한진송소상부동설(東漢晉宋所尙不同說)』(1584)까지 시기별로 편차되어 있고, 다시 1572년(선조 5)작부터 1586년(선조 19)의 『논성패(論成敗)』까지 시기별로 편차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인(門人)인 정개청의 문집으로 조선 중기 호남사림(湖南士林)의 종장(宗匠)으로 우리나라의 성리학(性理學)을 정립(挺立)시킨 백세불후(百世不朽)의 명작(名作)이다.

참고문헌

  • 김인호, 「여말선초 군주수신론과 『대학연의(大學衍義)』」, 『역사와현실』 제29호, 한국역사연구회, 1998.
  • 안동교, 「鄭介淸의 學風과 節義의 含意」, 『유교사상연구』 제40집, 한국유교학회, 2010.
  • 이정철, 「정개청 옥사(獄事)와 그 배경」, 『지역사학연구』 61권, 호남사학회, 2016.
  • 주유나, 「困齋 鄭介淸의 學問과 政論」, 조선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
  • 황갑연, 「유학의 발전사에서 본 自得의 의미」, 『양명학』 제29호, 한국양명학회,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