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천부(龍川府)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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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용천부 |
한글표제 | 용천부 |
한자표제 | 龍川府 |
관련어 | 용주(龍州), 장흥(長興), 용만(龍巒)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이상배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용천부(龍川府)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13년 10월 15일 |
조선시대 평안도 용천부 지역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용천부(龍川府)는 조선 광해군 때 후금과 명나라의 정세 변동에 대응하기 위해 용천군을 부로 승격하여 설립되었다. 이후 모문룡의 가도 점령 사건과 평안도 농민항쟁 사건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1895년(고종 32)에 의주부 용천군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용천부는 1413년(태종 13)에 용주에서 용천군이 되었다가 만주에서 흥기하는 후금과 명나라의 전쟁으로부터 압록강 하구의 해안선을 방어하기 위해 1621년(광해군 13)에 용천부로 승격되었다. 조선후기까지 유지되다가 1895년에 의주부 용천군이 되었다. 인조 때 모문룡의 가도 점령 사건이 일어나 용천부에서 방어막을 형성하였으며, 1812년(순조 12)에 평안도 농민항쟁이 발생했을 때 홍경래군에게 점령당하기도 했다. 다른 이름으로 용주(龍州), 장흥(長興), 용만(龍灣)이라고도 불렀다.
조직 및 역할
용천부는 고려시대에 종4품의 지주사(知州事)를 두어 다스리다가, 조선이 건국한 후 1406년(태종 6)에 지방 관서와 관리의 칭호를 개정할 때 지주사를 지군사(知郡事)로 개칭하고, 1413년에 행정구역 이름을 용천군으로 바꾸었다. 1466년(세조 12)에 관제 개편에 따라 지군사를 종4품의 군수로 바꾸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군수와 훈도(訓導) 각 1인을 두었으나 이후에 훈도를 폐지하였다. 1621년(광해군 13)에 용천부로 승격하면서 종3품의 도호부사를 두었다. 조선초기 『경국대전』이 편찬된 당시에는 평안도에 모두 6곳의 도호부가 존재했으나 변방의 국방 강화 필요성이 증대됨에 따라 『속대전』이 편찬될 때는 14곳으로 증대되었다. 도호부는 읍격(邑格)상 군수와 목사의 중간에 해당하는 것으로 고려시대에는 군사적 성격이 강하였으나, 조선시대는 일반 행정기구로 변화하여 전국에 설치되었으며 후기로 갈수록 그 수가 증대되었다.
용천부사는 국방상 중요한 곳이라는 인식하에 독진(獨鎭)이 되어 용천진병마첨절제사(龍川鎭兵馬僉節制使)를 겸하였고, 정묘호란이 일어나기 전인 1624년(인조 2)에 용천부사이희건(李希健)과 병자호란 이후 전국의 축성 사업을 벌인 숙종 때 용천부사를 지낸 정홍좌(鄭弘佐)는 전략상 용천부의 주요 거점인 용골산성의 보수공사를 진행하였다. 조선후기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 의하면 용천부 소속 관원으로는 좌수 1명, 별감 2명, 부행수 1명, 병방 1명, 장무 2명, 산성중군 1명, 별장 2명, 성장(城將) 4명, 집사 4명, 초관 4명, 영장 10명, 치총 8명, 독진 중군 1명, 별장 1명, 천총 2명, 파총 3명, 집사 4명, 초관 15명, 아전 26명, 서원 15명, 통인(通引) 18명, 사령 17명, 군뢰 69명, 관노 77명, 관비 40명이 있었다.
변천
용천부는 고려시대에 안흥군(安興郡)으로 불렸다. 993년(고려 성종 12)의 거란 침략 때 서희(徐熙)의 담판으로 강동6주를 고려의 영토로 확보하고, 이듬해에 이곳을 관할하기 위해 용주를 설치하였다. 1014년(고려 현종 5)에 거란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용주방어사(龍州防禦使)로 고쳤다. 조선이 건국한 이후 1396년(태조 5)에 용주의 겸관인 정융(定戎)·영덕(寧德)·영삭(寧朔) 고을을 떼어 정녕현(定寧縣)이라 하고, 1413년에 종2품의 관리가 파견되는 고을 이외의 지명에 주(州) 자를 가진 고을을 대상으로 지방 행정 구역을 개정할 때 군현 이름 가운데 주 자가 있는 지명은 산(山) 자나 천(川) 자로 바꾸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3년 10월 15일). 이때 용천군으로 바꾸었고, 1466년에 관제 개편을 하면서 지군사를 군수(郡守)로 바꾸었다. 이후 1616년(광해군 8)에 나라를 건국한 후금의 세력이 강대해지면서 1619년(광해군 11)부터 명나라의 요동 지역을 공략하기에 이르자 1621년에 용천 지역을 군사전략상 의주와 같은 규모로 승격시켜 용천부로 승격하여 종3품의 도호부사를 두었다. 1641년(인조 19)에는 청나라의 요청에 의해 용천부의 관아를 용골산성(龍骨山城)에서 양책참(良策站)으로 이전하였고, 1687년(숙종 13)에 용천부사에게 별영장을 겸임하도록 하였다. 1693년(숙종 19)에는 청북토포사(淸北討捕使)를 겸임하도록 했다. 1732년(영조 8)에 별영장을 없애고 독진으로 만들었으며, 이어 토포사를 겸임하도록 했다. 1895년에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의주부 용천군이 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 이존희, 「조선초 지방통치체제의 정비와 계수관」, 『동국사학』15·16 합집,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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