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현(龍仁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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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시대에 용인현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용인현(龍仁縣)은 고려 때인 1018년(고려 현종 9)에 광주(廣州)의 속현이 되었다. 1172년(고려 명종 2)에 감무가 설치되었다가 뒤에 현령(縣令)으로 승격되었다. 조선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어 진위·영평·양천·김포 등과 함께 현령 소재지가 되었다. 용인(龍仁)은 조선시대 여러 차례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현감(縣監)으로 강등되었다가 관례에 따라 강등된 지 10년 정도가 지나면 다시 현령으로 승격되기를 반복하였다. 1618년(광해군 10)에 현감으로 강등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현령으로 복구되었지만 1628년(인조 6)·1728년(영조 4)·1786년(정조 10)에 현감으로 강등되었고, 1617년(인조 15)·1738년(영조 14)·1796년(정조 20)에 다시 현령으로 승격되었다. 1795년(정조 19)에는 용인을 비롯하여 안산(安山)·진위(振威) 등 3개 고을을 화성의 속읍으로 삼아 화성을 지원토록 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충주부 용인군이 되었고, 이듬해에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용인현은 조선이 건국한 후 1414년(태종 14)에 용구(龍駒)와 처인(處仁) 두 현을 합쳐 비로소 지금의 이름인 용인(龍仁)이 되었다. 용구현(龍駒縣)은 고려 때인 1172년(고려 명종 2)에 감무가 설치되었다가 뒤에 현령으로 승격되었고, 처인현(處仁縣)은 조선 1397년(태조 6)에 현령이 설치되었다. 고려시대의 감무는 1106년(고려 예종 1)부터 중앙의 관리를 파견하지 못한 말단 지방행정 단위에 파견하기 시작하다가 조선시대에 들어 1413년(태종 13)에 군현제를 정비하면서 현감으로 개칭되었다. 현령은 고려 문종 때 시작된 제도를 조선에서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조직 및 역할

고려는 문종 때 관제를 정하여 현에는 7품 이상의 현령을 두었고, 1354년(고려 공민왕 2)에 7품 이하 경관으로 했다가 뒤에 안집별감으로 이름을 고쳐 5~6품의 관리를 임명하였다. 창왕 때 다시 고쳐 현령이라 하고 품계는 그대로 5~6품으로 하였다.

조선초기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경국대전』에 따르면 용인현에는 종5품의 현령 1명과 종9품의 훈도(訓導) 1명이 있었다. 훈도는 지방 향교의 교생을 지도하기 위해 생원·진사 중에서 선택하여 임명하였으나, 무록관이기 때문에 가지 않으려고 피하는 사람이 많았다. 지방의 향약이 활발해지면서 조선후기에는 모두 폐지시켰다. 『여지도서』에는 종5품의 현령 1명이 있었고, 소속 관원으로는 좌수 1명, 별감 2명, 아전 23명을 두었다. 좌수와 별감의 임무의 실제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6방을 분장해서 좌수가 이·병방을, 좌별감이 호·예방을, 우별감이 형·공방을 맡아 수령의 자문에 응하고 풍기를 단속하며, 향리를 규찰하는 등 수령을 보좌하는 것이었다. 지방 양반 중에서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는 자를 추대하여 우두머리를 좌수, 차석을 별감이라 하여 수령이 임명하였다. 임기는 대개 2년이었다. 아전은 지방 관청의 하급 행정실무자로 이·호·예·병·형·공의 6방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변천

용인현은 고려 초에 이름을 용구라 고쳤고, 1018년(고려 현종 9)에 광주의 속현이 되었다. 1172년(고려 명종 2)에 감무를 두었다가 뒤에 현령으로 승격되었다. 처인현은 본래 수원부 처인부곡(處仁部曲)이었는데, 조선 때인 1397년(태조 6)에 비로소 현령이 설치되었다. 1414년(태종 14)에 용구와 처인 두 현을 합쳐 용인으로 이름을 고쳤다(『태종실록』 14년 8월 21일). 1618년(광해군 10)에 역적 하인준(河仁俊)이 용인에 거주했다고 하여 읍호가 현감으로 강등되었다(『광해군일기(중초본)』 10년 11월 5일). 조선시대에 징벌을 위해 읍호가 강등된 경우, 10년을 기한으로 읍호를 복구시키는 것이 관례였다. 1628년(인조 6)에 또다시 역적이 일어나 읍호가 현감으로 강등되었고(『인조실록』 6년 2월 13일), 이후 1728년(영조 4)과 1786년(정조 10)에도 역적에 연루되어 현감으로 강등되었다. 그러나 각 강등 시기로부터 10년 정도인 1617년(인조 15)·1738년(영조 14)·1796년(정조 20)에 다시 현령으로 승격되었다. 1795년(정조 19)에는 용인을 비롯하여 안산·진위 등 3개 고을을 화성의 속읍으로 삼아 화성을 지원토록 하였다(『정조실록』 19년 윤2월 7일).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가 개편되어 전국이 23개 부 337개 군으로 바뀔 때 충주부 용인군이 되었다. 이듬해에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시행됨에 따라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경기(京畿) 용인현(龍仁縣)
  • 『여지도서(輿地圖書)』경기도(京畿道) 용인(龍仁)
  • 차문섭, 「중앙집권적 정치구조」, 『한국사』10, 국사편찬위원회,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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