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궁현(龍宮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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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용궁현(龍宮縣)은 신라시대에는 별도의 고을로 존재하지 않았고, 고려시대에 들어와 용주(龍州)로 불리다가 용궁군(龍宮郡)이 되었다. 고려시대에 용궁군은 상주(尙州)의 속군(屬郡)이었으며, 이후 용궁현이 되었다. 1172년(고려 명종 2)부터 감무(監務)가 파견되었고, 조선시대에도 용궁현으로 불렸다. 1413년(태종 13)에 용궁감무는 용궁현감(龍宮縣監)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용궁현감은 종6품의 관직이었다. 1895년(고종 32)에 용궁군이 되었으나 1914년에 폐지되고 예천군에 병합되었다. 조선시대에 용궁현은 현재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지역에 그 중심지가 있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용궁현은 신라시대의 축산(竺山) 혹은 원산(園山)으로 불리던 곳으로 당시에는 고을이 설치되지 않았으며, 고려시대에 들어와 고을이 신설되었다. 995년(고려 성종 14)에 용주자사(龍州刺史)를 두었으나, 1005년(고려 목종 8)에 자사가 폐지되었다. 1012년(고려 현종 3)에 용궁군이 되었고 이후 용궁현으로 변경되었다. 1172년에 감무가 파견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용궁현으로 불렸다. 1413년에 용궁감무는 용궁현감으로 개칭되었다.

조직 및 역할

고려시대에 용궁군은 상주에 소속되었다. 그런 까닭에 용궁에는 중앙에서 별도의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았으며, 상주에 파견된 지방관이 용궁을 관할하였다. 당시 용궁에는 별도로 읍사(邑司)가 설치되어 토착의 향리(鄕吏)들이 자치적으로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향리의 권한과 지위는 약화되고 현감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용궁현에는 종6품의 현감과 종9품의 훈도(訓導)가 파견되었다. 18세기의 지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용궁에는 6품의 문관(文官) 혹은 음관(蔭官)이 현감으로 임명되며,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2명, 군관(軍官) 30명, 인리(人吏) 30명, 지인(知印) 20명, 사령(使令) 21명, 관노(官奴) 12명, 관비(官婢) 11명이 편성되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종6품의 현감이 임명된다는 내용이 있다.

변천

1413년에 용궁감무의 용궁현감 개칭 이후, 오랫동안 용궁현과 관련한 연혁에서 별다른 변화는 없다. 1895년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용궁군이 되어 안동부(安東府)의 관할에 속했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용궁군은 경상북도 관할의 4등군으로 편제되었다. 1914년에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용궁군은 폐지되어 예천군에 합병되었다. 원래 조선시대에 용궁현의 관아가 위치했던 곳은 현재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향석리 지역이었는데, 홍수로 인하여 1859년(철종 10)에 용궁면 읍부리 지역으로 이전하였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