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괴(外怪)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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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외괴 |
한글표제 | 외괴 |
한자표제 | 外怪 |
상위어 | 병영(兵營), 방어영(防禦營), 진(鎭) |
동의어 | 욋괴보(倭叱堡), 욋괴진(夞怪鎭) |
관련어 | 진보(鎭堡), 채삼(採蔘) |
분야 | 정치/군사·국방/방어시설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송양섭 |
장소 | 평안도 강계부(江界府) |
규모(정면/측면/칸수) | 둘레: 433척, 높이: 4척 |
양식 | 석축(石築) |
관련 인물 | 남신중(南信中)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외괴(外怪)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성종실록』 18년 10월 17일, 『성종실록』 22년 5월 29일, 『고종실록』 6년 10월 20일 |
조선시대 평안도 강계군에 설치하여 만호가 관할하던 진보.
개설
욋괴진(夞怪鎭)은 평안도 강변(江邊) 7읍(邑) 중 하나인 강계군(江界郡)에 설치되었던 군사시설이다. 강변 7읍은 압록강 이북으로부터 이민족의 침입을 일차적으로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중에서도 강계군은 압록강의 상류 지점에 위치하여 대규모 적이 침입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지역으로 지목되었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이미 18세기 초반 강계군에는 평안도에서 가장 많은 10개의 진보가 촘촘하게 설치되었고, 4,605명의 군병이 배속되어 있었다. 욋괴진은 만포진(滿浦鎭)에서 강계부로 가는 길목에 설치되어 압록강을 건너 강계부 방향으로 침입하는 적군을 방어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위치 및 용도
평안도 강계부에서 북서쪽으로 123리(약 48㎞)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다. 욋괴진의 북쪽으로는 조선시대 강계부에서 가장 큰 진이었던 만포진이 위치하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압록강에서 약간 떨어진 산간 지역에 위치하여 도강에 성공한 적군이 강계부 등 내지로 진입하는 것을 방어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만포첨사와 강계방어사 간의 연락을 전하는 임무도 수행하였다.
한편, 강계부의 진보는 군사적 기능 외에도 채삼(採蔘)이라는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욋괴진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욋괴진 군병들은 인삼을 채집하는 기간이 되면 군사 업무를 잠시 뒤로하고 산에 올라가 인삼을 채취했다. 욋괴진이 담당하던 채삼 지역은 만포진에서 압록강을 따라 북쪽으로 이어진 지역이었다. 강계부에서 생산되는 인삼은 조선시대 국용 인삼의 대부분을 차지할 만큼 그 비중이 매우 높았다.
변천 및 현황
조선초기부터 군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권관이 파견되어 방어체제를 구축하였다(『성종실록』 18년 10월 17일). 1491년(성종 22) 만포의 욋괴에 새로 보를 설치했다는 기사 내용으로 볼 때, 욋괴보가 설치된 시점은 성종 즉위 이후로 보인다(『성종실록』 22년 5월 29일). 초기에는 욋괴에 목책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조선후기에는 석축(石築)으로 변경되었다. 17세기 인조대까지도 권관이 지휘하였다가 18세기 『속대전』 단계에서는 만호가 관할하는 진으로 격상되었다. 욋괴진에는 총 360명의 군졸이 소속되었다. 욋괴진은 1869년(고종 6) 혁파되었다(『고종실록』 6년 10월 20일).
형태
둘레 433척(약 131m), 높이 4척(약 1.2m)의 석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여지도서(輿地圖書)』
- 『만기요람(萬機要覽)』
- 『해동지도(海東地圖)』
- 『인재집(訒齋集)』
- 강석화, 「조선후기 평안도지역 압록강변의 방어체제」, 『한국문화』34,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4.
- 고승희, 「조선후기 평안도지역 도로 방어체제의 정비」, 『한국문화』34,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4.
- 문광균, 「18세기 강계지역 공삼제의 운영과 변화」, 충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0.
- 이철성, 「17세기 평안도 ‘강변 7읍’의 방어체제」, 『한국사학보』13, 고려사학회, 2002.
- 임성수, 「18세기 평안도 진보재정의 운영과 변화」, 『한국사학보』46, 고려사학회,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