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학훈도(倭學訓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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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원의 생도 또는 지방의 소통사에게 일본어를 가르친 관직.

개설

조선은 고려말에 침입이 극심했던 왜구를 진압하는 한편, 평화적으로 도해하는 세력에게는 자유로운 도항을 허락하였다. 1407년(태종 7)에 도항처를 제한하는 조처를 취했는데, 경상·전라도 연안으로 일본 배들이 드나들어 무역의 이득에 치중하는 사이, 연안 방어의 허점이 새어 나가거나 일본인들이 왕래가 급증함으로써 뜻하지 않은 사태가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대에는 경상도로 도항처를 한정하고 좌도에 동래현의 부산포(富山浦), 우도에 김해부의 내이포(乃而浦)를 지정하고 울산의 염포(鹽浦)를 추가하였다. 삼포 왜관을 설치한 이때부터 왜학훈도(倭學訓導)를 왜관 근방에 파견하였다.

사역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삼포 왜관이 갖추어진 세종대이며, 비슷한 시점에 왜학훈도의 규정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예종대에 소통사에게 일본어를 가르칠 학사를 세우도록 하고 훈도와 훈도에게 딸린 인원에게 주는 마료(馬料) 규정이 갖추어졌다. 이어 성종대에 한학훈도의 예에 따라 몽학·왜학·여진학 훈도도 30개월의 임기를 정하여 자주 교체되는 일이 없도록 했다.

담당 직무

삼포 왜관은 1510년(중종 5)에 일본인들이 무장 인원 4~5천 명을 동원하여 제포성을 포위하며 맹위를 떨친 삼포왜변으로 인해 폐지되었다. 2년 뒤에 조선은 일본의 간청을 받아들여 무역 규모를 삭감한 채로 제포에 왜관을 여는 것을 허락하였다. 제포 왜관은 1544년(중종 39)에 일본인들이 무역량 확대를 요구하면서 사량진왜변을 일으켜 폐지하였다가, 3년 만에 일본인들의 간청으로 동래 두모포로 장소를 옮겨 다시 왜관을 개설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임진왜란으로 단절된 조일 관계는 1607년(선조 40)에 회답겸쇄환사를 일본으로 보내고 2년 뒤인 1609년(광해군 1)에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함으로써 재개하였다. 1607년 무렵부터 두모포에 왜관이 다시 열리고, 1678년(숙종 4)에는 왜관을 초량으로 옮겼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 사신의 상경은 허락하지 않고 왜관에서 양국 간의 외교·무역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임진왜란 중에 동래·경상도의 문서가 불타버려 광해군대에서 인조 초반까지 일본 외교의 규정이 충실하지 못하였고(『인조실록』 7년 5월 13일), 1629년(인조 7)에는 목면 미지급분이 누적되어 공무역 분쟁에 휘말리기도 하였다.

사역원의 왜학훈도는 생도들에게 『경국대전』에 실린 「이로하」 등의 16개 교재로 일본어를 가르쳤다. 교재 중 일부는 17세기 중반까지도 왜학 교재로 쓰였는데, 내용은 일본 현지에서 사들여 온 동몽서(童蒙書)이거나 문어체 교재였다. 임진왜란 포로 출신 역관인 강우성(康遇聖)이 편찬한 『첩해신어』는 문어체 교재의 성격을 탈피한 대화체 교재로서 1670년대부터 역과의 교재로 사용되었다.

왜학훈도는 정9품이며 실직으로, 훈상당상(訓上堂上)이 참상관 가운데서 추천하였다. 17세기 이후 동래부에 파견된 왜학훈도는 역관 가운데서 일본어에 능숙하고 판단력이 있는 사람으로 차정되었다. 이외에 차비역관, 감동역관, 통신사행의 당상역관, 대마도로 파견되는 문위역관도 훈도와 마찬가지로 일본어 능력을 인정받고 경륜이 있는 역관들이 중첩되어 지명되었다.

동래부에 파견된 왜학역관이 소통사 30인에게 일본어를 가르친 내용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으며, 왜관 업무를 보조하는 기본적인 일본어를 가르쳤던 것으로 짐작된다. 동래부소통사 가운데 역과에 입격한 인물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왜학훈도는 동래부와 왜관 간의 의사를 중개하는 것이 일차적 역할이지만 사안에 따라 양국 간에 미묘한 사안을 주선하고 조정하며 현안을 교섭하는 책임도 강조되었다. 훈도는 동래부사의 지휘를 받으면서 왜관을 상대하는 실무적인 책임자였다.

변천

사역원의 왜학훈도이든 동래부의 왜학훈도이든 사역원의 역관 운용 구조를 따져서 이들의 위치를 파악해야 한다. 왜학훈도를 거친 후에 차비역관·감동역관으로 임명될 수도 있었고, 통신사행·문위행의 역관으로 선발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반대도 있을 수 있었다.

조일 간에 무역의 이득이 상당히 감소한 시기에는 중인 자제들이 일본어 전공을 기피하여 역량 있는 왜학역관들이 나오지 못했다는 점에서 동래부에 근무한 왜학훈도직 또한 부침이 있었다. 조선 정부는 사역원의 외국어 학습 진작을 위한 지속적이고 실효적인 대책을 세우기보다는 한정된 자원 내에서 외국어 능력이 뛰어나고 경험이 많은 일부 역관을 중첩적으로 기용하려 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역관상언등록(譯官上言謄錄)』
  • 『전객사일기(典客司日記)』
  • 『통문관지(通文館志)』
  • 이현종, 『조선전기 대일교섭사 연구』, 한국연구원, 1964.
  • 정광, 『사역원왜학 연구』,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90.
  • 오쿠라 신페이[小倉進平], 『朝鮮語學史』, 大阪屋號書店, 1920년 초판, 1964년 補註.
  • 이상규, 「동래부에 파견된 왜학역관(훈도·별차)의 기능」, 『청계사학』 14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청계사학회, 1998.
  • 이상규, 「17세기 왜학역관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0.
  • 나카무라 히데타카[中村榮孝], 「浦所の制限と倭館の設置」, 『日鮮関係史の研究』(上), 吉川弘文館,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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