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승(倭僧)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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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왜승 |
한글표제 | 왜승 |
한자표제 | 倭僧 |
동의어 | 일본승(日本僧) |
관련어 | 대장경(大藏經), 유구국(琉球國), 임진왜란(壬辰倭亂), 사승(使僧), 오키나와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한상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왜승(倭僧)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조실록』 1년 윤12월 28일, 『세조실록』 1년 8월 25일, 『세종실록』 6년 1월 2일, 『성종실록』 24년 7월 15일, 『선조실록』 28년 3월 24일 |
조선시대에 일본 승려를 일컫던 말.
개설
『조선왕조실록』에는 왜승(倭僧)과 관련된 기사가 건국 초기부터 선조 연간인 17세기 초반까지 모두 36건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조선중기까지 조선에 왜승들이 자주 찾아왔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을 찾은 왜승의 역할은 시기에 따라 다양했는데,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외교 사신의 역할, 둘째는 『대장경』을 요청하는 승려로서의 역할, 셋째는 임진왜란에 참여한 군승(軍僧)으로서의 역할이 그것이다.
이들을 대하는 조선 조정의 입장도 시기와 상황에 따라 달랐다. 대체로 조정의 입장에서 볼 때 이들은 늘 의심스런 존재였다. 고려시대 이후 왜국의 노략질이 빈번하여 많은 피해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잡아간 조선인을 송환하는 경우에는 왕이 잔치를 열어 환대하기도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일본의 승려와 유구국 승려를 모두 왜승이라고 칭하고 있다. 당시 유구국과 일본은 다른 나라였지만, 조선의 입장에서는 그들을 모두 ‘왜국’으로 인식하였다.
내용 및 특징
외교 사신으로 왜승을 주로 파견한 나라는 유구국(琉球國)이었다. 유구국은 1429년(세종 11)에서 1879년(고종 16)까지 존속한 나라로, 오늘날의 오키나와 일대에 있었다. 조선과 유구국은 지리적으로 가까웠기 때문에 다양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자 유구국 왕은 축하 사신을 보내, 자신들을 신하라고 낮추며 예물을 진상하기도 하였다(『태조실록』 1년 윤12월 28일). 또한 왜구에게 나포되었다가 유구국으로 팔려간 조선인을 수차례 돌려보내 주는 등 선린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럴 때마다 유구국에서는 사신을 파견했는데, 왜승은 직접 사신이 되거나 혹은 사신의 수행 승려가 되어 조선을 방문하였다.
불교 경전을 얻기 위해 왜승이 조선을 찾은 경우도 많았다. 1455년(세조 1)에는 왜승 도안(道安)이 사신으로 입국하였다. 세조가 조선의 표류민들을 두 차례나 송환해 준 일에 감사를 표하자 도안은 『대장경』을 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세조실록』 1년 8월 25일).
조선은 억불 정책을 표방하였기 때문에 조정 신료들은 『대장경』을 크게 중시하지 않았다. 왜국과 평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대장경』을 내주는 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자 왜승들은 인출본이 아니라 원판을 달라는 요구까지 하기도 했다. 태종은 실제로 경판을 줄 생각이 있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에도 일본 사신과 왜승들의 경판 요구는 계속되었고, 경판을 주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굶어 죽겠다고 협박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6년 1월 2일). 고려말기부터 조선전기까지 일본은 80여 차례나 『대장경』을 요구하였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인출본을 얻어 갔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전하지 않는 『초조(初雕)대장경』, 『송판(宋版)대장경』, 『원판(元版)대장경』의 판본이 일본에 많이 남아 있다.
한편 조선전기에는 일본 사신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사신으로 온 왜승이 진짜인지 의심스러운 경우도 종종 있었다. 1493년(성종 24)에 왜승 범경(梵慶) 등이 유구국 왕의 서신을 가져와 물품을 요청하였는데, 서신의 도장[印文]이 예전과 달랐다. 이를 의심한 조정에서는 논의를 했지만 진위를 가릴 수 없어 결국 사신으로 인정하고 답신을 보냈다(『성종실록』 24년 7월 15일).
변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승은 왜군의 첨병 역할을 수행하였다. 주로 장군을 보좌하는 참모로서 전략 수립에 동참하거나 명나라와의 교섭에 참여하였다. 왜승 현소(玄蘇)는 중국어를 안다는 이유로 군진에 동원되었는데, 조선과의 협상을 담당하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사신 노릇을 하였다(『선조실록』 28년 3월 24일). 왜승 일진(一眞) 역시 가토 기요마사의 공경과 신임을 받아 전쟁에 참여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서산 대사 휴정(休靜)이 의승대장을 맡자, 왜승 청한(淸韓) 등은 서산 대사를 찾아 일본군의 강성함을 과시하며 협박, 항복을 권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오윤희, 『대장경, 천년의 지혜를 담은 그릇』, 불광출판사, 2011.
- 이영, 「고려 말 왜구의 허상과 실상」, 『대구사학』91, 대구사학회, 2008.
- 한문종, 「조선전기 왜인통제책과 통교위반자의 처리」, 『일본사상』7, 한국일본사상사학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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