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교성(倭僑城)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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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왜교성 |
한글표제 | 왜교성 |
한자표제 | 倭僑城 |
상위어 | 왜성(倭城) |
동의어 | 예교(曳橋), 왜교(倭橋), 왜성대(倭城臺), 순천왜성(順天倭城), 순천성(順天城) |
관련어 | 노량해전(露粱海戰), 망해대(望海臺), 승주신성리성(昇州新城里城), 소서행장(小西行長) |
분야 | 정치/군사·국방/전쟁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방기철 |
장소 |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
양식 | 일본식 성(왜성) |
관련 인물 | 소서행장(小西行長)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왜교성(倭僑城)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 32년 2월 2일 |
임진왜란 당시인 1597년 9월에서 11월 사이 일본의 장수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전라남도 순천 지역에 축성한 왜성.
개설
일본군에 의해 축성된 성인 왜성은 주로 강화회담 시기와 정유재란 시기에 만들어 졌다. 왜성은 연락 유지를 위해 선박 출입이 용이한 강이나 바다에 인접한 구릉이나 야산 등에 축성되었는데, 현재 국내에는 32개의 왜성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97년(선조 30) 9월 직산(稷山)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은 전라도와 경상도 남해안 지역으로 이동하여 왜성을 쌓고 장기농성에 돌입하였다. 특히 전선이 전라도 지역으로 확대되자 순천에 왜교성을 쌓고 주둔하였다. 지금까지 왜교성을 축성한 인물이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와 등당고호(藤堂高虎)라고 알려져 왔지만, 최근에는 소서행장에 의해 축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위치 및 용도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위치한 왜교성은 일본군이 전라도 지역을 공격하기 위한 전진기지이면서도 최후 방어기지이기도 했다. 또 『난중잡록(亂中雜錄)』에 의하면 일본군이 일본군에 협조한다는 패(牌)를 받은 조선인들로부터 쌀 3말을 납부토록 한 것으로 보아 왜교성을 중심으로 경제활동과 농업활동도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이 축성한 왜성은 대부분 경상남도 남해안에 위치하는 데 반해 왜교성은 유일하게 전라도에 위치하고 있다. 왜교성의 축성으로 일본군은 남해왜성(南海倭城)-사천선진리왜성(泗川船津里倭城)-고성왜성(固城倭城)-창원왜성(昌原倭城)-양산왜성(梁山倭城)-울산왜성(蔚山倭城) 등으로 이어지는 상호 협력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변천 및 현황
일본군이 처음 왜교성을 축조할 당시 순천읍성과 구분하여 순천성이라고 불렀으며, 왜교·예교(曳橋)·왜성대(倭城臺)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광해군대에 순천부사로 재직하던 이수광(李睟光)은 왜교성의 이름을 망해대(望海臺)로 고치기도 했다.
왜교성은 일제강점기인 1938년 조선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령에 의거하여 고적으로 지정되었다. 해방 후인 1962년 승주신성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사적 제49호에 지정되었다가, 1997년 1월 1일 사적에서 해제되었다. 그러나 1999년 2월 26일 순천왜성이라는 이름으로 전라남도지정문화재 지방기념물 제171호로 다시 지정되었다.
형태
일본의 성은 성벽을 세 겹으로 하고 성 주곽부의 출입구인 호구(虎口)는 입구를 꺾어지게 하여 성안이 노출되지 않도록 한다. 또 평상시에는 무기 보관 및 망루의 역할을 하지만 전시에는 지휘소가 되는 망루인 천수각(天守閣) 등을 갖추고 있다.
왜교성은 일본 성의 특징이 잘 나타나는데, 지형적으로는 평산성(平山城), 지리적으로는 해안성(海岸城)이다. 성곽의 규모는 36,480평이다. 세 겹의 석성으로 이루어진 내성은 길이 1,342m, 높이 4m이다. 내성을 보호하기 위해 축성된 외성 역시 세 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길이 2,502m, 높이 5m이다. 천수각은 높이 6m, 크기 18m×14m이다. 이런 점에서 왜교성은 전형적인 일본식 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왜교성을 왜교(倭橋) 또는 예교(曳橋)라고도 불렀는데, 그 이유는 성을 축조할 당시 일본군들이 조명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주변에 있는 검단산성(劍丹山城)의 육지를 파내고 바닷물을 끌어들여 마치 해자와 같은 역할을 하도록 하고 출입하기 편리하게 연결다리를 설치한 데서 유래하였다.
1598년 8월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사망한 후 일본군은 조선에서의 철수를 결정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에 대한 일제 공격을 개시했다. 9월 36,000여 명의 조명연합군은 육군과 수군이 연합하여 왜교성에 주둔 중인 소서행장의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소서행장과 화의를 맺은 명의 유정(劉綎)은 육군을 출전시키지 않았고, 소서행장이 성을 비우자 다음 날 성을 점령하였다(『선조실록』 32년 2월 2일).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였던 노량해전 역시 왜교성에 주둔 중인 소서행장 군을 바다로 유인하기 위해 벌어진 것이었다.
참고문헌
- 『난중잡록(亂中雜錄)』
- 조원래, 「정유재란과 순천왜성론 재검토」, 『문화사학』27, 한국문화사학회, 2007.
- 천득염·조준익·정철성, 「순천왜성의 구조와 축성방법에 대한 조사연구」, 『건축역사연구』10권 2호, 한국건축역사학회논문집,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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