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세자조참의주(王世子朝參儀注)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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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왕세자조참의주 |
한글표제 | 왕세자조참의주 |
한자표제 | 王世子朝參儀注 |
관련어 | 조참의(朝參儀), 조하의(朝賀儀) |
분야 | 왕실/왕실의례/가례 |
유형 | 의식·행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강문식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왕세자조참의주(王世子朝參儀注)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성종실록』 19년 2월 24일 |
왕세자가 왕에게 조참(朝參)을 행하는 의례.
개설
조참의는 조선시대에 중앙 관서에 근무하는 관원들이 한 달에 4번씩 정전(正殿)에 모여 왕에게 문안하는 의식이다. 따라서 왕세자조참의는 왕세자가 백관들과 함께 왕에게 문안하는 의식을 말한다. 왕세자조참의는 『세종실록』 「오례」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등의 국가 전례서에 수록되지 않았고, 『조선왕조실록』에도 구체적인 의주(儀註)가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는 왕세자가 왕에게 조참을 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연원 및 변천
『조선왕조실록』에서 왕세자의 조참의주에 관한 내용이 등장하는 것은 1488년(성종 19) 2월이다. 당시 예조(禮曹)에서 왕세자의 조참의주를 정하여 보고했는데, 그 핵심은 왕세자가 먼저 들어와서 사배(四拜)를 행하고, 왕세자가 나간 뒤에 종친(宗親)과 문무(文武) 2품 이상 관원이 들어와 사배를 행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성종은 왕세자가 문무백관보다 먼저 예를 행하는 것은 어떤 예문(禮文)에 근거한 것인지를 물었고, 이에 대해 예조에서는 왕세자조참의주는 『국조오례의』에 나오는 조하의(朝賀儀)의 내용을 참작하여 정한 것이며, 고례(古禮)까지는 검토하지 못했다고 답하였다. 이에 성종은 고례를 상고함이 마땅하다고 지적하면서 일단은 세자가 백관을 거느리고 예를 시행하도록 지시하였다(『성종실록』 19년 2월 24일). 이는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되는, 왕세자조참의주에 관한 유일한 기록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의식에 관한 더 이상의 기사가 없고 국가 전례서에도 관련 내용이 없기 때문에 왕세자조참의주가 최종적으로 어떻게 정리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절차 및 내용
왕세자조참의주는 국가 전례서에 없는 것이어서 의주의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성종실록』에서 조하의에 의거하여 왕세자가 먼저 행례(行禮)하도록 한 예조의 의주에 대해 세자가 백관을 거느리고 예를 행하도록 했던 성종의 지시 내용을 고려할 때, 왕세자조참의는 왕세자가 종친 및 문무백관과 함께 왕에게 문안하는 방식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 기본적으로 조참의식이라는 점에서 『국조오례의』나 『춘관통고(春官通考)』에 수록된 조참의와 유사한 형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국조오례의』의 조참의 내용에 조하의의 왕세자 관련 내용을 참작·추가하여 의주를 추정해 보면 다음과 같다.
조참 1일 전에 액정서(掖庭署)에서는 어좌(御座)·향안(香案) 등을 정전(正殿)에 설치하고, 전의(典儀)는 왕세자의 막차와 왕세자·종친·문무백관의 자리를 설치한다.
조참 당일에 종친·문무백관은 조당(朝堂)에 모여 있다가 신호에 따라 정전 문밖의 정해진 자리로 나아가며, 왕세자도 필선(弼善)의 인도를 받아 정전 밖의 막차로 나아간다. 이어 종친·문무백관이 정전 안으로 들어와 배위(拜位)로 나아가고 왕세자도 안으로 들어와 배위로 나아간다. 왕이 정전에 도착하여 어좌에 오르면 왕세자와 종친·문무백관이 왕에게 사배를 하고 일어나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왕이 여(轝)를 타고 안으로 들어가면 왕세자와 종친·문무백관도 차례로 정전을 나온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춘관통고(春官通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