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양행궁(溫陽行宮)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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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온양행궁 |
한글표제 | 온양행궁 |
한자표제 | 溫陽行宮 |
상위어 | 행궁(行宮), 온궁(溫宮) |
동의어 | 온궁(溫宮) |
관련어 | 온행(溫行), 영괴대(靈槐臺), 온양별궁전도(溫陽別宮全圖) |
분야 | 왕실/왕실의례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후기 |
왕대 | 조선 후기 |
집필자 | 신명호 |
장소 | 온양 |
규모(정면/측면/칸수) | 내정전은 정면 4칸, 측면 4칸의 16칸 외정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12칸 탕실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12칸 |
양식 | 팔작지붕 |
관련 인물 | 현종, 인선대비, 사도세자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온양행궁(溫陽行宮) |
조선시대 왕실 사람들의 온천욕을 위해 현종이 온양에 복구한 행궁.
개설
온천욕을 통해 질병을 치료하는 온천 요법은 고대로부터 동양 의학에서 선호하는 질병 치료법이었다. 한국사에서도 삼국시대부터 온천욕을 이용한 역사가 있었다. 그런데 온천을 이용한 질병 치유는 그 특성상 국왕이 온천지에 머무는 시간이 길었다. 이에 따라 국왕과 관리들이 온천욕과 정무 활동, 숙식을 할 수 있는 임시 거처로서 행궁을 건축하였다.
조선 시대에 온천지역에 세워진 행궁을 ‘온궁(溫宮)’이라고 하였는데, 대표적인 온궁이 온양행궁이다. 온궁은 국왕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침전과 국왕과 관료들이 국정을 운영하는 정전, 탕치(湯治)를 위한 목욕 공간인 탕실(湯室)이 기본 축을 형성하였다. 이 중에 탕실은 다른 행궁과 달리 온천 목욕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온궁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시설이었다.
위치 및 용도
온양행궁은 충청남도 아산에 위치하였으며 왕실 사람들의 온천욕을 위해 건설되었다.
변천 및 현황
온양 행궁의 건립은 조선 초 세종대 이루어졌다. 세종은 자신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천행을 결심하고 나서 손수 직접 도면을 보면서 건축을 감독하였다. 세종은 민폐에 대한 우려로 인해 작고 소박한 행궁을 건립하였다. 행궁의 구조도 국왕뿐 아니라 병든 사대부와 일반 백성도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목욕 시설을 개조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다시 일본군이 재침한 정유재란으로 일본군이 전라도를 거쳐 북상하면서 온양 지역을 급습하자 온궁은 불타고 폐허가 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온궁은 방치되었고 국왕들의 온행도 중단되었다. 조선 후기 국왕의 온천행이 재기된 것은 현종대이다. 현종은 자신의 질병을 치료할 목적으로 온양온천을 선택하고 5차례나 온행을 하였다. 이때 온양행궁이 복구되어 처음에는 어실 6칸, 온천방 6칸을 비롯한 약 1백여 칸 규모였지만 후에 내정전 16칸, 외정전 12칸, 탕실 12칸 등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현종 이후 숙종, 영조, 장헌세자까지 4대 95년 간에 국왕과 왕세자의 온양 온천 행차는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장헌세자의 온행 이후 국왕과 왕실 가족의 온행은 중단되었다. 하지만 정조가 부친인 장헌세자의 추억의 장소인 온궁에 영괴대를 설치하고 영괴대비를 세우는 등 각별한 관심을 두어 관리하였다. 이후 온궁은 많이 퇴락하였지만 1834년(순조34) 온양에 온 조수삼의 「온정기」에 의하면 이 무렵까지 행궁의 건물은 완전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1871년(고종 8)에는 국왕이 정무를 보던 정전이 없어졌지만 이 무렵 새로운 건물인 함락당과 혜파정이 신축되고 대원군이 별장으로 사용하는 등 여전히 잘 유지되었다. 그러나 1904년부터 일인들이 온궁을 불하받으면서 그들의 손에 넘어가고 그 터에 대중탕과 여관을 겸비한 신정관이 지어지면서 온궁은 자취를 감추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형태
1795년(정조 19)에 발간된 『온궁사실(溫宮事實)』에 수록된 ‘온양별궁전도’에 의하면 온양행궁은 2중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내궁장(內宮墻)의 가운데에는 국왕과 왕후의 숙소인 내정전과 왕과 신하가 국사를 논하는 외정전이 있고 옆에는 목욕 시설인 탕실이 있다. 내정전은 정면 4칸, 측면 4칸의 16칸이고 외정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12칸이며 탕실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12칸이었다. 그 외 왕자방, 의대청, 내수라간, 온천 구탕, 영괴대, 신정비각, 종친부 등이 있었다. 이 내궁장과 외궁장(外宮墻) 사이에는 왕을 보필하는 궐내 각사들이 옮겨와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위치하는데 와가, 초가로 되어 있는 여러 채의 집들이 산재되어 있었다. 탕실은 목욕 공간으로 온천물이 용출하는 온정(溫井)을 가운데 두고 동서로 각각 1칸 반의 크기인 욕실 2개가 있었고 이에 딸린 부속 시설로 욕실별로 온돌 1칸 반, 협실 1칸, 양방(凉房) 1칸 등이 위치하고 있었다. 온정은 옥돌로 함 가운데를 빙 둘러 붙였다. 이곳에는 중국의 온천에서 볼 수 있는 거북이나 물고기, 게와 같은 동물이나 연꽃과 마름과 같은 식물을 형상화한 장식물과 완상할 만한 보옥이나 기교 있게 새긴 치장이 없었다. 하지만 돌의 재질이 뛰어나고 만듦새가 완벽하고 치밀하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1760년(영조 36) 7월에 사도세자가 온양행궁에 행차하여 서쪽 담장 안에서 표적을 정해 활쏘기를 한 후 품(品)자 형태로 세 그루의 회나무를 심었다. 훗날 정조가 이것을 기념하여 영괴대(靈槐臺)를 세웠다.
참고문헌
- 『溫幸謄錄』
- 『溫宮事實』
- 『承政院日記』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溫幸 연구」, 『장서각』9, 2003.
- 김일환, 「조선시대 온양 행궁의 건립과 변천 과정」, 『인문과학논총』29, 순천향대학교,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