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류천(玉流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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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창덕궁 후원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인공 폭포와 계곡.

개설

옥류천(玉流泉)은 창덕궁 후원의 가장 북쪽 깊숙한 곳에 널찍한 바위와 정자들이 어우러져 한 폭의 선경(仙境)을 연출하는 곳이다. 자연의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면서 약간의 인공을 가해 조성한 정원으로 한국 정원의 특색이 잘 드러난다. 옥류천 공간은 어정(御井), 계류, 정자, 지당(池塘), 수전(水田), 암반, 폭포, 수림이 한데 어우러져 조화로운 정원을 이룬다. 1636년(인조 14) 가을에 조성한 이래로 많은 왕이 즐겨 찾으며, 곡수연(曲水宴)을 하거나 시를 읊으며 정원을 향유했다.

위치 및 용도

옥류천은 창덕궁 후원의 가장 안쪽 계곡에 위치해 있다. 헌종대에 쓰인 『궁궐지(宮闕志)』에는 소요정(逍遙亭)의 서쪽에 있다고 기록되었다.

인조대에 조성된 이래로 많은 왕이 옥류천을 방문하여 시를 읊으며, 정원을 즐겼다. 숙종은 옥류천의 아름다운 폭포에 대해 오언절구(五言絶句) 시를 지어 인조의 ‘옥류천’ 글씨 위에 새겼다.

정조는 이곳에서 신하들과 함께 경치를 마음껏 둘러보고, 옥류천이 굽어 도는 곳에 이르러 술과 음식을 내리고 물가에 앉아 잔을 기울이고 시를 읊게 하였다(『정조실록』 17년 3월 20일). 정조는 난정(蘭亭)의 계모임을 모방하여 곡수연을 행한 것인데, 곡수연은 중국왕희지(王羲之)의 「난정기(蘭亭記)」에서 유래한 것으로 굽이치며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놓고 시를 읊는 일종의 원림 향유 문화이다.

변천 및 현황

옥류천을 처음으로 꾸미기 시작한 왕은 인조이다. 1636년(인조 14)에 인조는 옥류천의 큰 바위에 어필로 ‘옥류천(玉流川)’이라는 세 글자를 새겨 넣었다. 이후 소요정·태극정(太極亭) 등의 정자를 조성하였다.

형태

인조는 옥류천 바닥돌을 조금 깎아 계곡물이 흘러 들어오게 만들고, 물이 암반을 둥글게 휘돌아 흘러서 소요정 앞에 폭포가 되어 떨어지게 했다. 이는 곡수연에 즐기기 용이한 곡수거(曲水距)의 형태를 띤다. 옥류천에 흐르는 계곡물은 북악의 동쪽 줄기인 매봉의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것이며, 이 계류 위에는 간결한 판석의 석교들이 여러 개 놓여 있다. 옥류천은 ‘옥같이 맑게 흐르는 시냇물’이라는 뜻인 만큼, 맑고 차가운 물이 흐른다. 옥류천을 중심으로 소요정·태극정·농산정(籠山亭)·청의정(淸漪亭)·취한정(翠寒亭)의 5개 정자가 서로 어우러져 선경을 이룬다. 각 정자에서 보이는 옥류천 일원의 경관은 미묘하게 다르다.

관련사건 및 일화

정조는 매년 옥류천을 따라 세심대(洗心臺)에 올라 꽃을 감상하고 편을 나누어 활을 쏘게 하였다. 이때 정조는 60세가 넘은 신하들에게 모두 지팡이를 하사하여 산을 오르는 데에 편하게 하라고 명하였다(『정조실록』 19년 3월 7일).

1884년(고종 21) 10월에 청나라 병사들이 총포를 쏘며 창덕궁에 침입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고종은 옥류천 뒤 북쪽 담문을 통해 북묘(北廟)로 향하여 궁 밖으로 피신하였다(『고종실록』 21년 10월 19일).

순종대에는 비원(祕苑)에서 꽃관람회를 개최하였고, 순종과 왕비가 친림하여 종친과 귀족 등이 따라왔다. 이때 취규정(聚奎亭)과 옥류천, 육각정 등에 모의점(模擬店)을 설치하여 이왕직(李王職) 고등관 이하 그 가족 및 고용원 등에게 음식을 내렸다(『순종실록부록』 5년 4월 16일).

참고문헌

  • 『궁궐지(宮闕志)』
  • 이광호, 『궁궐의 현판과 주련 2』, 수류산방, 2007.
  • 정재훈. 『한국전통조경』, 조경, 2005.
  • 최종덕, 『조선의 참 궁궐 창덕궁』, 눌와, 2006.
  • 한영우, 『조선의 집 동궐에 들다』, 열화당, 2006.
  • 홍광표·이상윤, 『한국의 전통조경』, 동국대학교출판부,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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