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삼계반란(吳三桂叛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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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의 삼번 제거 정책에 반기를 들고 오삼계가 일으킨 반란.

개설

오삼계가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정남왕(靖南王) 경중명(耿仲明)·경계무(耿繼茂) 등과 함께 일으킨 반란이다. 이들 세 세력을 삼번(三藩)이라 일컬었다. 이들의 반란은 10여 개 성(省)에서 9년간 진행되었다. 그러나 결국 오삼계의 반란을 비롯한 삼번의 난은 진압되었으며, 이는 청조가 반청 세력을 제거하고 내부의 안정을 다지는 기초가 되었다.

역사적 배경

오삼계는 명나라 숭정(崇禎) 연간에 전쟁에서의 공을 인정받아 벼슬이 총병(總兵)에까지 이르렀고, 명말 산해관(山海關)을 지키는 최후의 장수가 되었으며 평서백(平西伯)에 봉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산해관을 포기하고 오히려 청과의 연합을 통해 북경으로 들어와 이자성 농민군과 싸워 명의 수도를 청나라에 쉽게 내어주었으며 그 대가로 평서왕(平西王)에 봉해져 삼번 중의 하나가 되었다.

발단

오삼계는 무과에서 장원을 차지해 산동에서 군사작전 지휘관으로 복무했다. 부친 오양(吳襄)이 1634년 요동으로 복귀하자 오삼계 역시 그를 따라왔다. 1637년 오삼계는 1,600여 명을 지휘하는 지휘관이 되었다. 2년 뒤 단련총병(團練總兵)이 되었으며 1640년에는 요동총병(遼東總兵)이 되었다.

1644년 이자성(李自成)이 북경을 압박하자 의종(毅宗)은 오삼계를 평서백(平西伯)으로 봉하고 그에게 수도로 돌아와 구원할 것을 명령하였다. 오삼계는 북경이 반란군에 함락되었다는 것을 알고 산해관에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이자성은 오삼계의 아버지를 인질로 잡고 투항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자성이 직접 그의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향해 오삼계를 진압하려 하자 오삼계는 후금의 섭정인 예친왕(睿親王) 도르곤([多爾袞], ᡩᠣᡵᡤᠣᠨ)에게 반란군에 대항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도르곤은 상황을 보면서 오히려 명나라를 정복하고자 하였다. 양쪽으로부터 압박을 받자 오삼계는 만주에 투항하고 도르곤으로부터 다시 평서왕이란 칭호를 얻었다.

오삼계와 도르곤 연합군은 이자성의 대군을 공격하였고 이자성은 결국 북경을 포기하고 오삼계의 부친 오양과 그의 일족을 모두 처형하고 도주한다. 1644년 6월 4일 도르곤이 이자성을 대신해 북경의 주인이 되었다. 그해 10월에 황제인 순치제가 북경으로 천도하였다. 순치제는 오삼계에게 마보병 1~2만을 지급하고 이자성을 추격하도록 하였고, 결국 이자성은 자살하였다. 순치제는 이후 오삼계를 요서의 금주(錦州)에 주둔하도록 하였다.

북경을 점령한 청은 국내의 반청 세력을 평정해야만 했다. 특히 남명(南明) 세력 등 반청 세력을 제거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였다. 이 과정에서 청에 투항한 평남왕 상가희, 정남왕 경중명과 경계무, 그리고 평서왕 오삼계가 삼번(三藩)이 되었는데 이들이 반청 세력을 제거하는 데 많은 공을 세우고 있었다.

1648년 오삼계는 주둔지를 금주에서 섬서(陝西)의 한중(漢中)으로 옮겨 그 지역의 반청 세력을 토벌하였다. 삼번 중 오삼계의 군대가 매우 강력하고 위협적이어서 청은 그에게 많은 작위를 하사하는 등 우대와 회유책을 쓰며, 오삼계를 통해 반청 세력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1657년에는 다시 사천(四川) 방면의 반청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그를 평서대장군으로 임명하고 귀주(貴州)와 운남(雲南)으로 보내 명의 계왕(桂王)을 추격하도록 하였다. 2년 동안 운남성의 반청 세력을 지속적으로 토벌하자 청은 그를 평서친왕(平西親王)으로 다시 봉했다. 오삼계는 운남·귀주·남경(南京)·서촉(西蜀) 등을 평정하고 운남으로 주둔지를 옮긴 이후 한층 강해졌으며 군사, 행정 등에서도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현종실록』 4년 3월 1일). 광동의 상가희와 복건의 경정충도 오삼계와 거의 유사한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경과

청은 삼번 세력을 이용하여 반청 세력을 어느 정도 제거하였으나, 그와 더불어 삼번의 세력이 커지면서 이들은 점차 청나라에 새로운 위협이 되었다. 1673년 강희제는 삼번의 철폐를 결심한다. 이에 오삼계는 ‘천하도초토병마대원수(天下都招討兵馬大元帥)’라 자칭하며 청에 반기를 들었다. 삼번의 난이 시작되었다. 오삼계는 1674년을 주왕(周王) 원년으로 선포했다. 운남, 귀주, 호남을 근거지로 삼고 있던 오삼계는 동전 주조, 티베트와의 무역, 산림과 광산개발 등으로 막대한 경제력을 축적해 나갔다. 이러한 오삼계의 성장에 처음에는 청 조정이 열세에 있었지만 청 조정은 점차 오삼계를 고립시켜 나갔다. 1678년 오삼계는 제위에 올라 소무(昭武)라고 건원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병사하고 말았다. 오삼계의 손자 오세번(吳世璠)이 연호를 홍화(洪化)로 바꾸고 그의 뒤를 잇고자 했으나 청군에게 포위되어 1681년에 자살함으로써 오삼계의 난은 종말을 고하였다.

삼번은 청 조정의 입장에서는 반청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세력 확장은 중앙집권에 방해가 될 뿐이었으므로 그들을 제거한 것이었다.

삼번의 난은 10여 개의 성에 걸쳐 전후 9년간 지속된 내전이었다. 삼번 중에서도 특히 오삼계 세력은 중국 내부뿐 아니라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5세와 연계하고, 오이라트 출신 준가르([準噶爾], Зүүнгар) 부족의 갈단을 지원하여 외몽골 통일을 도모하는 등의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청으로서는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세력이었다. 청 조정은 삼번의 난에 대한 진압을 계기로 중앙집권체제를 한층 안정되게 확립할 수 있다. 동시에 강희제가 자신감을 가지고 왕권을 강화하며 강희·옹정·건륭제의 태평성세 시대를 여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청 사절을 수행한 조선 출신 역관 장효례(張孝禮)는 청 내부에 조선이 오삼계 반란의 진압을 위해 지원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 삼는 분위기가 있다면서 조총을 보낼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숙종실록』 1년 3월 2일).

참고문헌

  • 樊樹志, 『晩明史』, 復旦大學出版社, 2003.
  • 李治亭, 『吳三桂大全』, 江蘇敎育出版社,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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