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五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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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 경전인 『역경(易經)』 ·『서경(書經)』·『시경(詩經)』·『예기(禮記)』·『춘추(春秋)』를 이르는 말.

개설

오경(五經)은 유교의 다섯 가지 기본 경전인 『역경』·『서경』·『시경』·『예기』·『춘추』를 이른다. ‘경(經)’은 본래 날줄로서 피륙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데, 성인(聖人)의 변치 않는 가르침의 의미를 가진다. 한편 반고(班固)의 『백호통의(白虎通義)』에서는 『춘추』 대신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오경에 넣기도 하였으며, 송(宋)나라 왕응린(王應麟)의 『소학감주(小學紺珠)』「예문류(藝文類)」에서는 『주역』·『서경』·『모시(毛詩)』·『예기』·『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오경이라고 하였다.

편찬/발간 경위

유교에서는 예로부터 시 · 서(詩書)를 기본 교재로 채택하였으나, 이것을 ‘경’으로 칭하고 권위를 높인 것은 순자(筍子)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오경’ 이란 용어가 성립된 것은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었던 데서 비롯하였으며, 선제(宣帝)는 제유(諸儒)에게 명하여 오경의 이동(異同)을 논하게 하였다. 당시의 오경은 『역경』·『서경』·『시경』 외에 『의례(儀禮)』나 『춘추공양전』을 가리켰다. 그러나 당시인들은 대부분 ‘육경(六經)’이란 용어를 즐겨 썼는데, 반고가 『백호통의』에서 사용하면서 ‘오경’ 이라는 용어가 널리 쓰였다고 한다. 영제(靈帝) 때에는 제유를 초치하여, ‘오경’의 문자를 정한 후 돌에 새겨 대학문(大學門)에 세웠다. 그 후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오경’은 현재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고,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오경정의(五經正義)’ 를 칙찬하면서 ‘오경’이 확정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유교를 중요시했으며, 조선시대에 와서 유교를 국교로 한 까닭에 ‘사서오경(四書五經)’은 중요한 국시의 기초가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 초기인 1425년(세종 7) 본격적으로 오경이 편찬되었다. 그해 10월 세종은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와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게 “『성리대전(性理大全)』·오경·사서(四書) 등을 인쇄하려고 하니, 그 책에 쓸 종이를 값을 주고 닥[楮]으로 바꾸어, 충청도는 3천 첩(貼), 전라도는 4천 첩, 경상도는 6천 첩을 만들어 진상하라.”고 명하였다.(『세종실록』 7년 10월 15일) 이어 1427년(세종 9)에는 충청도·전라도·경상도·강원도에 ‘사서오경대전’의 복각을 분담시켰는데, 이 ‘사서오경대전’은 조선 유학의 기본 교재로 공인되었다. 선조(宣祖) 때 교정청(校正廳) 언해본도 이것을 저본으로 이루어졌고,(『선조실록』 8년 3월 7일) 정조(正祖) 연간의 규장각 강의도 이 교재를 이용하였다.

구성/내용

‘오경’은 다섯 가지 유교의 ‘경’을 말하며, 이것을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공자(孔子)와 그의 제자들은 유가 학파로서 춘추시대(春秋時代)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하나일 뿐이었다. 그런데 통일제국을 이룩한 한(漢)나라 무제가 기원전 136년에 동중서(董仲舒)의 건의에 따라 오경박사 제도를 시작한 이후, 유학은 독존적 지위를 얻었다. ‘오경’은 2,000년 이상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일관되게 중국인의 정통적인 정신생활의 기반이자, 주축이 되어왔다.

『시경』은 서주(西周) 초기인 기원전 1100년 경부터 춘추시대 중기 기원전 600년 경까지 약 500년 동안 중국 각 지방에서 유행했던 노래의 가사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집(詩歌集)이다. 『시경』의 저자는 평민, 군인, 하급관리, 사대부, 사랑하는 남녀 등인데, 그 내용은 노동의 즐거움과 고통, 지배층에 대한 분노와 풍자, 전쟁의 비애, 애정과 혼인, 주나라 민족의 기원과 발전 등 다양하다.

『서경』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 알려져 있다. 중국 고대의 요순시대(堯舜時代)부터 주(周)나라에 이르기까지 정사(政事)에 관련된 문서들을 공자가 편찬했다고 전한다. 『서경』의 기록 대부분은 주왕조의 사관이 기록했는데, 군왕과 대신 사이의 대화, 군왕에 대한 대신의 건의, 인민에 대한 군왕의 통고, 전쟁에 임하는 군왕의 맹서, 군왕이 신하에게 특권과 책임을 부과하는 명령 등의 문서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기록들의 내용에서 중국 고대 사상의 뿌리인 유가의 덕치주의, 도가의 무위사상, 나아가 묵가(墨家)와 법가(法家)의 사상까지 포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나라 이전에는 공문서라는 의미로 ‘서(書)’라고 불렀다. 이후 소중한 경전이라는 뜻을 담아 한나라 이후에는 『상서(尙書)』, 송(宋)나라 이후에는 『서경(書經)』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역경』은 『주역(周易)』이라고도 하는데, ‘변화한다’라는 의미의 ‘역’이 말해주듯이, ‘천지만물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원리’를 풀이한 책이다. 그 변화는 양과 음의 기운이 수시로 바뀌는 이원론으로 이루어진다. 이 ‘양(―)’과 ‘음(--)’의 단위를 수차례 조합하면 다양한 종류의 형태가 생겨나는데, 이것을 ‘괘’라고 한다. 이 괘의 조합 양태에 따라 세상의 변화를 설명한다. 전설상의 인물인 복희(伏羲)가 8괘를 창안했고 이후 64괘로 발전했다고 한다.

『예기(禮記)』는 공자와 그 제자들이 예(禮)에 관해 논한 내용을 수록한 책이다. 천자(天子)부터 선비에 이르기까지 신분에 따라 달라지는 각종 의례와 규칙과 행위의 규범이 실려 있다. 또한 이 책은 교육, 예절, 음악, 농사, 관혼상제 등 고대의 문화 전반에 관해 유가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이 다양한 예설(禮說)들을 전한(前漢)시대의 대성(戴聖)이 편집해 오늘날의 『예기』가 된 것이다.

『춘추(春秋)』는 춘추시대(春秋時代) 노(魯)나라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역사서다. 사서의 하나인 『맹자(孟子)』에는 『춘추』의 편찬 동기가 “세상이 쇠퇴해져 도(道)가 없어지자 사악한 말과 폭행이 잇달았다. 또한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자식이 어버이를 죽이는 일이 일어났다. 공자는 이를 걱정해 『춘추』를 지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공자는 요순시대와 주공(周公)의 정치를 이상으로 여겨 당시의 잘못된 시대 상황을 바로잡고자 『춘추』를 집필한 것이다. 오늘날도 대의명분을 밝혀 세우는 역사 서술을 ‘ 추필법’ 라 하는데, 바로 『춘추』에서 유래한 것이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강문식, 『『오경천견록』을 비롯한 권근의 경학 저술 분석서―권근의 경학사상 연구』, 일지사, 2014.
  • 송영배, 『중국사회사상사』, 한길사, 1986.
  • 장백잠(蔣伯濳)·장조이(蔣祖怡) 푠, 최석기·강정화 역주, 『유교경전과 경학』, 경인문화사, 2002.
  • 최진덕, 『군자의 나라-일상을 지배한 인간의 윤리 사서오경』, 명진출판사,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