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禮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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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경전으로, 오경(五經) 가운데 하나.

개설

『예기(禮記)』는 유교 경전으로서 오경(五經)의 하나이며, 4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경(禮經)’이라고 하지 않고, 『예기』라고 하는 것은 예(禮)에 관한 기록 및 주석(註釋)의 의미를 나타내서이다. 즉 주(周)나라 말 진한시대(秦漢時代)에 걸쳐 여러 유학자들이 고례(古禮)에 관한 학설들을 집록(輯錄)하였기 때문이다. 일명 『소대례(小戴禮 : 또는 소대예기(小戴禮記))』라고도 한다.

『예기』의 성립은 분명하지 않으나, 공자(孔子)가 3대(三代 : 하(夏)ㆍ은(殷)ㆍ주(周)) 이래의 문물제도ㆍ의례ㆍ예절 등을 집대성하여 제자들을 가르치면서라고 보고 있다. 『예기』는 유교의 예치주의(禮治主義)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기본이다. ‘예’는 국가의 통치 수단이자, 동시에 교화의 방법으로 정치제도로부터 사회적 도덕규범, 수신(修身)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초기에 이미 전해져서, 통일신라 이후로는 관리 등용 시험의 필수 과목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저술된 『예기』 관계 문헌으로는 『예기대문언독(禮記大文諺讀)』과 권근(權近)의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 등이 유명하다.

편찬/발간 경위

『예기』라는 이름은 한(漢)나라 정현(鄭玄)의 『육예론(六藝論)』 “지금 세상에서 행해지고 있는 예는 대덕(戴德)과 대성(戴聖)의 학(學)이다. 대덕은 기(記) 85편을 전했으니, 곧 대대례(大戴禮)이고, 대성은 예 49편을 전했으니, 곧 예기이다.”라며 처음 등장한다. 원래 『예기』의 기는 ‘예’에 대한 참고의 뜻이고, ‘예’ 또는 ‘예경(禮經)’에 관련된 토론·주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즉 『예기』는 일반명사로서의 ‘예의 주석서’였다. 이것이 현재의 고유명사 ‘예기’로 굳어졌다.

『예기』의 시작을 공자로 볼 수 있다. 공자는 삼대 이래의 문물 제도와 의례·예절 등을 집대성하고 체계화하는 것을 스스로의 책무로 삼았고, 제자들을 가르침에 있어서도 예를 익히고 실천하는 데에 역점을 두었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은 각 국으로 흩어져 공자의 가르침을 전파하면서 예에 대한 기록이 쌓여 가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생전의 스승에게 들은 이야기, 학설, 스승과 나눈 대화 등을 문자로 정착시켰고, 다시 그들의 제자들에게 전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한(漢)나라 때에는 제자의 제자, 또는 그 문류(門流) 후학들에 의해 기록된 예설(禮說)들이 200여 편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쯤 예학(禮學)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가 등장하였고, 그 가운데 대덕과 대성은 흩어져 있는 예설들을 수집·편찬하였다. 대덕은 자를 연군(延君)이라 하며 대대(大戴)라 일컬어지고, 대성은 자를 차군(次君)이라 하며 소대(小戴)라고 불린다. 대덕은 대성의 작은아버지이다. 두 사람 모두 한나라의 선제(宣帝) 때 학자인 후창(后倉)의 학통을 이어받았다.

대덕의 85편은 대대례기, 대성의 49편은 소대례기라고 하는데, 정현이 『주례(周禮)』·『의례(儀禮)』와 함께 소대례기에 주석을 붙여 삼례(三禮)라 칭한 후 소대례기가 『예기』로 자격을 가지게 되었다. 반면 대대례기는 흩어져 일부가 사라지면서,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40편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 대대례기와 소대례기를 각각의 것으로 보지 않고, 대대례기 85편에서 49편을 정리·편찬한 것이 소대례기로 보는 학설도 존재한다.

『예기』를 주석한 정현은 신중하고 엄밀한 학문적 자세를 취해 원전을 존중하였는데, 잘못이 분명한 대목이더라도 원문의 글자를 고치는 대신 주석으로 지적해 두는 데 그쳤다. 이러한 정현의 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해 당(唐)나라의 공영달(孔穎達) 같은 학자는 “예는 바로 정학(鄭學)이다.”라고 그를 높이 추켜세우기도 하였다. 공영달은 당나라 태종(太宗)의 명을 받아 『오경정의(五經正義)』의 편수에 참여하였는데, 『예기정의(禮記正義)』의 편찬에 있어서는 정현의 주를 바탕으로 웅안생(熊安生)·황간(皇侃)의 『의소(義疏)』를 참작해 독자적인 정리를 하였다. 이후로 『예기』는 정주공소(鄭注孔疏)라 해서 정현의 주와 공영달의 소가 원전 못지않게 중요시되었다. 『예기』는 이렇게 여러 사람이 잡다하게 기록한 것을 모은 책이기 때문에, 그 내용이 체계가 없고 번잡한 느낌이 없지 않으며 편차(編次)의 배열도 일정한 원칙이 없다.

한편 『예기』의 판본은 원문만을 수록한 것, 원문과 주석을 합록한 20권본(本), 정의(正義)만을 수록한 단소본(單疏本) 70권, 원문·주·소를 모두 수록한 63권본 등이 있다.

『예기』가 우리나라에 전해졌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중국의 『삼국지(三國志)』「위서동이전(魏書東夷傳)」이나 『주서(周書)』 등에 “서적으로는 오경(五經)이 있다.”는 등의 기록이 있어, 삼국시대 초기에 이미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통일신라 이후로는 관리 등용 시험에 필수 과목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나라 학자에 의한 첫 번째 주석은 고려 말 권근이 14년에 걸쳐 저술한 26권 11책의 『예기천견록』이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예학(禮學)의 흥성과 함께 뛰어난 학자들에 의해 수많은 주석서가 간행되었다. 그런 가운데 명(明)나라 호광(胡廣) 등이 칙명을 받아 찬집한 『예기집설대전(禮記集說大全)』 30권이 널리 읽혀졌을 뿐만 아니라 판각도 되었다. 이는 원래 『오경대전(五經大全)』의 하나로 수록된 판본이기도 하다.

서지 사항

1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존하는 책의 크기는 세로 30.2cm, 가로 19.6cm이며, 지질은 한지이다.

규장각에 소장 중이다.

참고문헌

  • 엄연석, 「『예기』 텍스트의 개념 지도 분석을 통한 사회적 덕목으로서 ‘신뢰’ 연구」, 『동아시아문화연구』 51,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2012.
  • 이봉규, 「조선시대 『례기』 연구의 한 특색-朱子學的 經學」, 『한국문화』 47,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9.
  • 이유정, 「『예기(禮記)』의 상례(喪禮)·제례(祭禮)에 나타난 죽음론의 교육적 의의」, 『교육철학연구』37-1 , 한국교육철학학회, 2015.
  • 최연식, 「『예기』에 나타난 예의 법제화와 유교입헌주의」, 『한국정치학회보』 43-1, 한국정치학회,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