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평군(永平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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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시대에 경기도의 영평군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영평군(永平郡)은 고려 1018년(고려 현종 9)에 동주(東州: 지금의 철원)에 소속되었다. 1106년(고려 예종 1)에 감무를 설치하였으며, 뒤에 영흥현령(永興縣令)으로 승격되었다. 1393년(태조 2)에 영평현(永平縣)으로 이름을 고쳤고, 용인·진위·양천·김포 등과 함께 현령(縣令) 소재지가 되었다. 1394년(태조 3)에 경기도를 좌·우도로 나눌 때 영평을 경기좌도에 소속시켰다. 1836년(헌종 2)에 군으로 승격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한성부 영평군이 되었고, 이듬해에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영평군은 조선이 건국한 후 1393년에 비로소 영평현으로 이름을 고치고 현령을 두었다. 1618년(광해군 10)에 경기감영을 새로 설치하면서 포천과 합쳐 대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1836년(헌종 2)에 헌종의 태실을 가봉(加封)하는 역사(役事)를 마치고 군으로 승격시켰다.

조직 및 역할

영평군은 『경국대전』에 현령 1명과 훈도(訓導) 1명을 두었다. 훈도는 지방 향교의 교생을 지도하기 위해 생원·진사 중에서 선택하여 임명하였으나, 무록관이기 때문에 가지 않으려고 피하는 사람이 많았다. 지방의 향약이 활발해지면서 조선후기에는 모두 폐지시켰다. 『여지도서』에는 6품의 현령 아래에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10명, 아전 20명을 두었다. 좌수와 별감의 경우, 군에는 3명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임무는 수령의 자문에 응하고 풍기를 단속하며, 향리를 규찰하는 등 수령을 보좌하는 것이었다. 지방 양반 중에서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는 자를 추대하여 우두머리를 좌수, 차석을 별감이라 하여 수령이 임명하였다. 임기는 대개 2년이었다. 군관은 군사적인 실무를 담당하였고, 아전은 지방 관청의 하급 행정실무자로 이·호·예·병·형·공 등의 6방 업무를 맡았다. 1836년에 군으로 승격된 후에는 군수를 두었다.

변천

영평군은 1106년(고려 예종 1)에 감무가 설치되었고, 뒤에 위사공신(衛社功臣) 강윤소(康允紹)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영흥현령(永興縣令)으로 승격되었다. 1393년(태조 2)에 영평현(永平縣)으로 이름을 고쳤다. 동북면의 화령부(和寧府)가 영흥부(永興府)로 이름이 바뀌었기 때문에 영흥현(永興縣)을 영평으로 고친 것이다. 1435년(세종 17)에 영평을 양주에 소속시켰으며, 1593년(선조 26)에 포천을 영평에 소속시켰다. 1618년(광해군 10)에 경기감영을 새로 만들면서 대도호부로 승격시키고, 포천현(抱川縣)을 여기에 옮겨 함께 설치하였다. 1623년(인조 1)에 다시 영평과 포천으로 복구시켰다. 1836년(헌종 2)에 태실을 가봉하는 역사를 마치고 군으로 승격시켰다(『헌종실록』 2년 4월 5일).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가 개편되어 전국이 23개 부 337개 군으로 바뀔 때 한성부 영평군이 되었다. 이듬해에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시행됨에 따라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포천군과 합쳤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차문섭, 「중앙집권적 정치구조」, 『한국사』10, 국사편찬위원회,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