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파보(寧波堡)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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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영파보 |
한글표제 | 영파보 |
한자표제 | 寧波堡 |
상위어 | 방어영(防禦營), 병영(兵營), 진(鎭) |
관련어 | 안정보(安定堡), 진보(鎭堡) |
분야 | 정치/군사·국방/방어시설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송양섭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영파보(寧波堡)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조실록』 6년 5월 25일 |
조선시대 함경도 갑산군에 설치한 군사시설인 보(堡).
개설
함경도는 조선초기부터 여러 진보를 설치하여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고 지역사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영파보가 소속돼 있는 갑산군(甲山郡)은 본래 허천부(虛川府)였는데, 조선초기에는 호인(胡人)들에게 점거되어 여러 차례 병화를 겪으면서 거주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고려시대에 갑산만호부였던 것이 조선에 와서 1413년(태종 13)에 갑산군으로 고쳐졌다. 영파보는 주민들을 외적으로부터 보호하며 국경을 방어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위치 및 용도
갑산군의 북쪽 압록강 변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세종대 이후 혁파되면서 정확한 위치는 현재 비정할 수 없다. 다만 갑산군에 소재하고 있었고, 적들이 쉽게 넘어와서 노략질을 했던 것으로 보아 국경지대에 설치된 진보였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한편 『해동역사』에는 약간 다른 내용 내용이 실려 있다. 두만강 바깥쪽 지역은 본래 우리나라의 지역에 속하는데 국초에 영파보, 진지달보(榛遲達堡), 안정보(安定堡) 등의 진을 설치하였다가 세종조 이후로 모두 폐지하였다는 것이다. 이 내용에 따르면 세종대 이전까지만 해도 두만강 건너 지역도 조선의 영토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곳에 사는 주민들을 보호하고 영토를 지키기 위해 영파보를 비롯해 여러 진보를 설치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파보는 압록강이 아닌 두만강 건너편에 있던 진보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두만강 건너 지역을 갑산부에서 관할하였는지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영파보의 역할은 지역민을 야인들로부터 보호하고, 국경지대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진보의 역할은 위로 소속 진관의 지휘에 따라 군사 활동을 전개하고, 아래로는 소속 파수처를 책임지며, 봉수를 관리하여 위급상황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영파보와 같이 국경 인근에 소재한 진보는 범월과 밀무역을 단속하는 것도 중요한 임무였다.
변천 및 현황
영파보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서는 1460년(세조 6) 기사가 유일하다. 함길도도체찰사 신숙주(申叔舟)가 계를 올려 갑산 영파보에 적들이 침입하여 남녀 6명을 죽이고, 1명을 사로잡았으며, 우마를 약탈해 갔다고 보고하자 지군사(知郡事)조경례(趙敬禮)가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세조실록』 6년 5월 25일). 『해동역사』에서는 두만강 건너편에 설치하였던 영파보, 진지달보, 안정보가 세종조 이후 모두 폐지되었다고 하였지만, 영파보는 위 기사에서처럼 세조 6년까지도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실록뿐 아니라 지도나 지리지 등에도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얼마 지나지 않아 혁파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해동역사(海東繹史)』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강석화, 「조선후기 함경도 육진지역의 방어체제」,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고승희, 「함경도 내지 진보의 변화」,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노영구, 「조선후기 함경남도 간선 방어체계」,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오종록, 「조선초기 양계의 군사제도와 국방체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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