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令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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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왕세자가 신하에게 발급한 임명장.

개설

영지(令旨)는 왕세자가 대리청정을 시행할 때 3품 이하의 관직을 제수하면서 해당 관원에게 발급한 임명장이다. 영지의 서식은 문무관 4품 이상의 고신식(告身式)에 준하되 왕세자의 인장을 찍어서 발급했다.

내용 및 특징

영지는 왕세자가 대리청정을 행할 때 발급한 임명 문서이다. 넓은 의미로서의 영지는 휘지(徽旨)와 함께 왕세자의 명령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좁은 의미에서의 영지는 왕세자가 문무관 3품 이하의 관원을 임명하면서 발급해주는 임명장에 해당한다.

세종대에 왕세자의 대리청정에 대한 규정이 처음으로 마련되었는데, 왕세자에게 인사권을 위임하되 문무관 3품 이하 관직을 제수하도록 임명 대상의 범위를 정하였다(『세종실록』 30년 10월 7일). 이후 숙종대, 영조대, 순조대에 시행된 왕세자 및 왕세손의 대리청정 때에도 세종대의 전례를 따라 왕세자는 3품 이하의 관원을 직접 임명할 수 있었다.

영지의 문서 형식은 기본적으로 왕이 발급하는 교지, 즉 『경국대전』에서 규정한 ‘문무관사품이상고신식(文武官四品以上告身式)’에 준하였다. 첫 줄에 ‘영지’라 적고, 다음 줄에는 임명 대상 관원의 성명과 관직명을 적고[某爲某階某職者], 그다음 줄에는 영지의 발급일자[年號年月日]를 기재하였다. 그리고 연호 부분에 왕세자의 인장(印章)을 찍는데, 왕세자의 위호에 따라 ‘왕세자인(王世子印)’ 또는 ‘왕세손인(王世孫印)’을 찍었다. 왕세자의 인장은 왕세자로서 책봉(冊封) 의식을 거행할 때 왕으로부터 수여받은 것이다. 또 영지의 뒷면 왼쪽 하단에 작은 글씨로 담당 관원의 소속과 성명을 기재하였다. 임명장을 작성하는 서리는 대개 집안마다 단골로 지정해두고 그 집안의 임명장을 도맡아 담당하게 하였다. 그래서 이들을 소위 ‘단골서리’라 일컫기도 하였다.

현전하는 영지의 실물은 숙종대에 왕세자인 경종이 발급한 사례가 다수를 차지하고, 영조대에 왕세손인 정조가 대리청정할 때 발급한 사례가 함께 남아있다. 이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발급된 영지는 1719년(숙종 45) 2월에 왕세자가 송상유(宋相維)에게 내려준 사례로 확인된다.

영지는 왕세자가 대리청정을 행할 때 발급한 명령문서 가운데 하나로, 현전하는 영지의 실물 사례를 통해 왕이 왕세자에게 3품 이하 관직을 제수하도록 한 제한된 인사 권한을 위임하여 국정 운영의 일부분을 다스리도록 한 사실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변천

영지는 휘지와 함께 왕세자의 명령 또는 명령서로 사용되었다(『태종실록』 11년 6월 3일), (『세종실록』 9년 10월 16일). 왕세자의 명령 또는 명령서를 영지로 일컫는 것은 당나라의 제도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의 경우, 영(令)은 황태자가 발급하는 문서이자 태황태후·황태후·황후가 발급하는 문서이며, 황태자가 발급하는 영에는 영서(令書)와 영지 두 종류가 있다고 하였다(『세종실록』 4년 9월 9일).

세종대에 왕세자인 문종이 처음으로 대리청정을 시행하였는데, 왕세자가 3품 이하의 관직을 제수할 때에는 휘지라고 개칭하여 임명장을 내려주었다. 그러나 숙종대부터 영조대, 순조대에 시행된 대리청정기에는 영지라는 명칭으로 임명장을 발급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中村裕一, 『唐代公文書硏究』, 汲古書院, 1996.
  • 조미은, 「조선시대 왕세자 대리청정기 문서 연구」, 『고문서연구』 36 , 2010.
  • 조미은, 「조선시대 왕세자문서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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