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정모사도감(影幀摹寫都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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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의 영정을 그려서 봉안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관청.

개설

조선시대에 왕의 초상화는 왕과 마찬가지로 여겨 도감을 설치하고 의례 절차와 제작 과정 전체를 의궤로 작성하였다. 현재 조선후기의 관련 의궤로는 『영정모사도감의궤』 7건과 『어진도사도감의궤』 2건이 전한다. 영정과 어진은 모두 왕의 초상화를 지칭하는 말이다. 영정은 조선후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대부분에서 영정(影幀)으로 통일되었다. 한편 어진은 1713년(숙종 39)에 설치된 어용도사도감에서 논의를 거쳐 ‘어진’이라는 한국적 용어를 채택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 영정은 태조를 비롯한 선대왕의 초상화를 모사하거나 본떠 그릴[移模] 때 주로 사용되었다. 반면 숙종·영조·고종·순종과 같이 생전에 왕의 초상을 그릴 경우에는 어진이라고 부르고 있어 양자 간에 개념상 차이가 있다. 영정모사도감의 조직과 운영은 시기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일 뿐 큰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에는 국조(國祖)인 태조의 초상화를 여러 곳에 안치하였는데, 이는 조선 왕실의 건재함과 왕권의 강화를 상징하기 위해서였다. 왕의 초상화를 지칭하는 말로 조선 초기에는 다양한 용례가 사용되었다. 1398년(태조 7)에는 ‘진영(眞影)’과 ‘영자(影子)’, 1409년(태종 9)에는 ‘진용(眞容)’, 1419년(세종 1)에는 ‘성진(聖眞)’이나 어용(御容)’ 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태조를 비롯한 선대왕의 초상화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대부분 ‘영정’으로 통일되었다. 한편 어진의 경우 1713년에 설치된 어용모사도감에서 ‘어진’이라는 한국적 용어를 채택하였다. 이것은 어진을 모시는 건물[永禧殿]을 진전(眞殿)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조선 초기부터 고종·순종까지 전 시기에 걸쳐 태조를 비롯한 선대왕의 초상화가 훼손되면 새로 그리기 위해 영정모사도감을 설치·운영하였다. 한편 조선후기에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왕들, 숙종이나 영조·고종 등은 왕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어진도사도감을 설치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중에서 조선후기에 도감을 설치하여 운영한 것은 아홉 차례였으며 현재 규장각과 장서각, 파리 국립중앙도서관에 총 9건의 의궤가 소장되어 있다. 이를 통하여 영정모사도감의 운영 조직과 의례 절차, 제작 과정의 전말을 파악할 수 있는데, 이를 정리하면 아래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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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및 역할

영정모사도감의 총책임자는 정1품의 재상 1명으로 도제조를 맡았다. 총괄 책임은 도감의 규모나 그릴 영정의 숫자에 따라 제조 1~4명이 맡았다. 실무 책임자 또한 숫자가 달라져 도청 1~2명과 낭청 1~2명을 파견하였다. 영정모사도감의 업무는 크게 영정 모사와 봉안 의식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이를 위해 도감의 하부 제작처는 비교적 단출한 1방과 별공작으로 구성되었다. 1방은 영정을 옮기는[移運] 데 필요한 신연(神輦)과 신여(神轝)를 조성하고 영정을 그리며 배접(褙接)하고 표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 필요한 화원이나 장인을 동원하고 소요되는 물품을 조달하였다. 영정의 제작 과정을 맡은 1방을 실질적으로 감독하고 책임을 지는 전문가는 감조관이며, 그 아래 영정을 그릴 화원들과 장인들이 소속되었다. 한편 별공작에서는 목수나 소목장, 칠장 등 1713년에는 9종 21명이었던 장인들이 각종 기물과 도구를 제작하였다.

영정도감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는 선왕의 영정이나 왕의 초상화를 잘 그리는 일이었다. 따라서 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은 도감이 설치된 직후부터 여러 인물들이 추천되었다. 이들은 취재(取才)를 통해 실력의 우열을 가늠하였고 그 가운데 가장 잘 그리는 사람이 선발되었다. 시험을 통해 선발된 화원은 주관(主管) 화사, 동참(同參) 화사, 수종(隨從) 화사로 업무가 분장되었다.

영정도감의 처소는 궁궐 안의 전각을 작업 장소로 선택하였으며, 이곳에는 온돌을 놓고 매일 한 단씩 땔감을 지급하여 채색이 마르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하였다. 한편, 그림을 그릴 비단, 채색, 종이를 비롯하여 바닥에 깔 자리나 각종 그릇류도 모두 영정도감에서 마련하여 지급하였다.

화원은 초본을 그린 후 정본을 완성하였다. 완성 후, 왕과 도감의 당상들이 참석하여 정본을 확인하였다. 봉심(奉審)하여 봉안(奉安)하기로 결정되면 배첩장이나 직조장, 재금장, 해문장 등 1713년에는 36종 38명 이상이었던 장인이 장황(裝潢)을 하였다. 그다음으로는 봉안할 곳으로 옮기기 전에 궁궐 전각에 옮겨 보관하였다.

이렇게 십여 명의 화원과 수십 명의 장인들이 동원되어 완성된 왕의 영정은 왕과 동일시하여, 영정 옮기는 일을 왕의 행차에 버금가게 준비하였다. 전주 경기전에 있던 태조의 영정은 모사하기 위해 경기전에서 옮겨 서울에 도착하면, 왕이 직접 한강 나루에 나와 영정을 맞이하기도 할 정도였다. 완성된 영정을 선원전이나 영희전, 전주 경기전 등의 진전 봉안처까지 봉안할 때도 군사 60명이 호위하며 가마에 실어 왕과 마찬가지의 행렬로 봉안하였다.

참고문헌

  • 김문식 외 저; 외교통상부 편, 『(파리 국립도서관 소장) 외규장각 의궤 조사연구』,외교통상부,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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