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사(靈源寺)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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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영원사 |
한글표제 | 영원사 |
한자표제 | 靈源寺 |
상위어 | 불교(佛敎), 사찰(寺刹) |
동의어 | 영원암(靈源庵) |
관련어 | 두류산유람기(頭流山遊覽記), 부휴선수(浮休善修), 홍복영(洪福榮)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종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영원사(靈源寺)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정조실록』 9년 3월 8일 |
지리산 쌍계사의 산내 암자였다가 조선후기에 독립 사찰로 승격한 절.
개설
영원사(靈源寺)는 신라 경문왕 때 영원(靈源) 조사(祖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지리산의 사찰이다. 그런데 조선후기 유학자들이 남긴 지리산(두류산) 유람기에서는 쌍계사의 산내 암자로서 창건된 지 오래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1611년(광해군 3)경에는 부휴선수(浮休善修)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수행하였다. 18세기에는 쌍계사에서 독립하여 사찰로 승격되었으며, 영원사의 승려 혜준(慧俊)이 홍복영 역모 사건에 관련되었다.
내용 및 특징
신라 경문왕 때 영원 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문헌이나 유물은 없다. 그런데 박여량(朴汝樑)은 1610년에 쓴 「두류산일록(頭流山日錄)」에서 영원암(靈源庵)은 쌍계사의 산내 암자로서 창건된 지 오래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한 유몽인(柳夢寅) 역시 1611년에 쓴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에서 영원암에 이름난 승려 선수(善修)가 살면서 제자들을 거느리고 불경을 공부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17세기까지 암자였던 영원암이 18세기에는 독립적인 사찰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원사의 행정 구역은 오늘날에는 함양에 속하지만 조선시대에는 하동에 속하였다. 정조 때 홍복영(洪福榮) 역모 사건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하동 영원사에 거주하던 승려 혜준이 서찰을 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정조실록』 9년 3월 8일). 영원사와 관련해서는 「번갈아 드는 생」, 「영원조사와 명학동지」, 「나암강사 이야기」, 「완호강사 이야기」, 「문구멍으로 황소가 들어오다」 등의 설화가 전한다.
참고문헌
- 이상구 외 저, 『지리산권 불교설화』, 심미안 2009.
- 최석기 외 옮김,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돌베개, 2007.
- 최석기 외 옮김, 『지리산 유람록 – 용이 머리를 숙인 듯 꼬리를 치켜든 듯』, 보고사, 2008.
- 고성훈, 「정조조 홍복영 옥사와 산인세력」, 『동국사학』26,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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