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교회(英國敎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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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조선과 수교한 뒤 영국 선교사들이 선교를 하기 위해 세운 교회.

개설

영국교회(英國敎會)는 1891년(고종 28) 인천에 처음 개설되었다. 1876년(고종 13) 개항 이후 한국에 본격적으로 기독교가 포교된 것은 1892년에서 1893년경으로 보고 있다. 개항 직후 쇄국 정책이 해제되었으나 경성에는 외국인의 거주가 허락되지 않았으며 포교도 불가능했다. 그러던 것이 1882년 조선과 청국 간에 수륙무역장정(水陸貿易章程)이 체결되면서 경성 내 외국인 거주가 가능해졌다. 이후 영국과 미국의 선교사들이 경성과 인천 등의 주요 도시에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영국과 미국 등의 각 교회는 충분한 설비, 포교 비용과 함께 신념이 가득한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한국인으로 교도가 되면 교회의 보호에 의하여 관헌의 제재에서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보장받기가 용이하였다. 한국 관헌은 외교간 문제로 불거질 행동을 하지 못했다. 또한 청일전쟁 등의 전화에서도 외국인의 생명과 재산은 보호되었기 때문에 기독교도의 위신이 높아져서 한국인의 신뢰가 깊어졌다. 선교사들도 한국 관헌의 무능을 설교하며 폭도로부터의 위해를 면하는 것은 기독교의 보호에 기대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설교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영국교회도 한국에서의 포교에 성공할 수 있었다.

1890년 영국인 찰스 존 코프(Charles John Corfe) 주교(bishop)가 5명의 사제와 부산항으로 입국하였다. 첫 영국교회는 인천의 내동교회였으며, 경운궁 옆에 위치하던 영국공사관 주변에 서울 주교좌 대성당을 세우며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1911년부터 현재의 성공회대성당 자리에 교회 건립이 추진되었으며, 1922년에 착공되어 1926년 준공되었다.

조직 및 역할

영국교회는 종고성회(宗古聖會), 복음교회(福音敎會), 잉글랜드협회, 영국 성서공회(聖書公會)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통감부 시기 영국교회의 규모를 보면 전국적으로 교회당 149개, 부속학교 37개, 선교사 12명, 한국인 목사 45명, 신도 8,802명, 부속병원 1개 등이었다. 이 중 경성에 교회당 12개, 부속학교 24개, 학생 565명, 선교사 9명, 한국인 목사 19명, 신도 4,092명, 부속병원 1개가 있었다. 지방에서는 수원과 강화도에 신도가 많았다. 또한 충청도에 교회당 2개, 한국인 목사 2명, 신도 100명이 있었으며 충청북도 진천(鎭川)에 신자가 많았다.

일제강점기에는 교세가 확장되어 총독부를 통해 대한제국기의 건물들을 빌리기도 하였다. 1912년에 영국교회는 조선총독부를 통해 북한산성(北漢山城) 사고(史庫) 건물을 10년간 빌릴 것을 신청하여 허가받았다(『순종실록부록』 5년 1월 8일).

변천

1912년에 서울 주교본당의 확장을 위해 대한제국기 구 수학원(修學院)의 토지 건물을 조건부로 빌려줄 것을 조선총독부에 요청했다. 차용 조건에 대하여 영국교회 주교와 경성 주재 영국 총영사(總領事) 대리가 대표하여 협상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차용 조문에 차용 기간은 만 5년이며, 토지 건물은 종교상의 목적 이외에는 사용할 수 없다고 했다. 차용료는 무료이고 차용 기간 중에 조선총독부에서 필요한 경우 사용하거나 또는 반환케 하는 일도 가능하다고 하였다(『순종실록부록』 5년 3월 18일).

참고문헌

  • 『매일신보(每日新報)』
  • 김원모, 『근대 한국 외교사연표』, 단국대학교출판부, 1984.
  • 김학준, 『서양인들이 관찰한 후기 조선』, 서강대학교출판부, 2010.
  • 이순우, 『정동과 각국공사관』, 하늘재, 2012.
  • 임경석·김영수·이항준, 『한국근대외교사전』, 성균관대학교, 2012.
  • 김갑득·김순일, 「구한말 서울 정동 영국공사관의 건립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168, 2002.
  • 이헌주, 「개항기 영국의 대한정책과 주한 영국공관」, 『개항기 재한 외국공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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