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소(念佛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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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람이 모여 아미타불을 부르며 염불 수행을 하는 곳.

개설

염불소(念佛所)는 염불을 하기 위해 만든 공간으로, 여러 사람이 이곳에 모여 서방정토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며 북과 징을 치면서 부처의 명호를 염송하였다. 신라시대 이래로 정토신앙은 백성들에게 가장 보편적인 불교 신앙 가운데 하나였으므로, 도성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 염불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도성의 염불소는 혁파되었으나, 지방의 큰 사찰이나 염불결사(念佛結社)가 있는 곳에는 염불소가 남아 있었다.

내용 및 특징

여러 사람이 모여 염불하는 곳을 염불소 또는 염불당(念佛堂)이라 한다. 염불이란 순간순간 변화하는 마음에서 부처를 잊지 않기 위해 부처의 이름을 지속적으로 부르는 일을 말한다. 즉 한순간이라도 부처를 잊지 않기 위해 마음속으로 혹은 입으로 계속 부처를 부르는 행위를 뜻한다. 여기서 부처는 대개 서방정토에서 중생을 교화하고 있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가리킨다.

아미타불은 부처가 되기 전 과거세에 한나라의 왕이었는데,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이 세상에 출현했을 때 그 설법을 듣고 큰 보리심(菩提心)을 내어 모든 권력을 버리고 출가하여 법장(法藏) 비구가 되었다. 법장 비구는 깨달음을 얻어 가장 수승한 정토를 만들겠노라고 발원하였고, 또 고통 받는 중생이 자신의 이름을 지극한 마음으로 부르면 그를 정토로 인도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그리고 5겁의 세월 동안 수행한 끝에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 아미타불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중생들은 아미타불이 있는 서방정토에 태어나기 위해 지극정성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른다.

신라시대 이래 염불신앙이 대중화되면서 곳곳에 염불소가 세워졌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경덕왕대에 삽량주(歃良州: 현 양산) 근처 포천산(布川山)에서 염불 수행을 하던 다섯 비구가 서방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또 강주(康州: 현 진주)에서 수십 명이 모여 10,000일 동안 염불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들 이야기 속의 인물들이 모여 염불을 하던 곳이 바로 염불소인 셈이다. 고려시대에도 승속(僧俗)을 가리지 않고 무리를 이루어 염불했다는 기록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특히 천태종에서는 염불 수행을 적극 권장하였는데, 백련결사(白蓮結社)를 개창한 요세(了世)는 날마다 1,000번씩 염불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염불신앙은 백성들에게 가장 일반적인 불교 신앙이었다. 조정에서는 숭유억불(崇儒抑佛)을 기조로 내세우며 불교를 배척하였으나, 그 신앙까지 없앨 수는 없었으므로 백성들의 불교 신앙은 지속되었다. 조선전기까지는 도성 안 여러 곳에 염불소가 있어서, 이곳에 모여 북과 징을 치며 염불을 하였다. 1471년(성종 2)에 대사헌 한치형(韓致亨)이 시의(時宜) 17조를 올렸는데, 그 가운데 "도성의 거리 한가운데에 절을 창건하고는 염불소라 칭하고 있다."(『성종실록』 2년 6월 8일)며 불교를 비판하자, 도성의 염불소에서 남녀가 섞여 징을 울리고 북을 치는 것을 금하게 하였다(『성종실록』 2년 6월 18일).

이에 따라 도성 안의 염불소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염불하는 신앙 단체가 여러 곳에서 결성되었다. 더욱이 조선후기의 불교계에서는 선(禪)·교학(敎學)·염불 등을 공부하는 삼문수학(三門修學)이 보편화되었으므로, 큰 사찰에는 선을 공부하는 선원, 교학을 공부하는 강원, 염불하는 염불당이 설치되었다. 또 10,000일 동안 염불하면 서방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여러 곳에서 만일염불결사가 결성되기도 하였다. 만일염불결사로 유명한 곳은 쌍계사 칠불암, 철원 심원사, 금강산 건봉사, 경주 기림사, 포항 오어사 등이다.

참고문헌

  • 『삼국유사(三國遺事)』
  • 한상길, 『조선후기 불교와 사찰계』, 경인문화사, 2006.
  • 이종수, 「조선후기 불교의 수행체계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