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熱河)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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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열하 |
한글표제 | 열하 |
한자표제 | 熱河 |
동의어 | 피서산장(避暑山莊), 승덕리궁(承德離宮) |
관련어 | 행궁(行宮), 열하일기(熱河日記) |
분야 | 정치/외교/사행 |
유형 | 지명 |
지역 | 중국 |
시대 | 청 |
왕대 | 청 |
집필자 | 한지선 |
이칭 | 피서산장(避暑山莊), 승덕리궁(承德離宮)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열하(熱河)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정조실록』 4년 11월 4일 |
중국 하북에 위치한 청 황제의 행궁 및 그 일대를 가리키는 명칭.
개설
하북(河北) 승덕시(承德市)의 북부에 위치한 행궁(行宮)과 그 일대를 가리킨다. 강희제가 이곳에 피서산장과 사묘를 건설하기 시작하여 이후 건륭제 시기에 크게 확장되었다. 청 황제는 이곳에서 여름에 더위를 피하고 수렵을 즐겼다. 황제가 일정 기간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국가의 정치·군사·민족에 관한 여러 사무를 처리하며 정치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는데 특히 변방 민족에 대한 사무가 많았다. 황제는 피서산장과 그 주변에 조영된 사묘 등지에서 봉상(封賞)·조견(朝見)·수렵 및 종교 활동을 거행함으로써 소수민족의 우두머리들을 관리하였다.
명칭 유래
열하는 본래 무열수(武烈水)를 가리키며 또한 서장수(西藏水)라고도 하였다. 수원은 3군데인데 승덕시(承德市)에서 합류되어 피서산장 행궁의 동북 지역을 따라 흘렀다. 행궁 안에 온천이 솟아 무열수로 들어가니 열하라고 하였는데 겨울에도 심하게 춥지 않는 이상 얼지 않았다. 1703년 피서산장이 이곳에 건설되면서 열하는 열하행궁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었다.
자연 환경
열하의 피서산장은 많은 산들로 둘러싸여 지세가 높고 기후는 적당하여 청대 황제가 여름에 더위를 피하여 머물곤 하였다. 황제는 피서산장에 머물면서 각 변방의 소수민족 왕공과 수령들을 회견하기도 하였다.
형성 및 변천
1703년 강희제가 이곳에 피서산장을 건설한 뒤 열하는 열하행궁(熱河行宮)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지만, 황제의 수렵장이었던 목란위장(木蘭圍場)과 부인사(溥仁寺)·부선사(溥善寺) 등 외팔묘(外八廟)라고 일컫는 묘우들이 포함되기도 하였다. 열하행궁은 피서산장(避暑山庄)·승덕리궁(承德离宮)이라고도 하였다. 1703년에 건설하기 시작하여 1790년에 이르기까지 90여 년에 걸친 공사를 통하여 준공되었다. 피서산장은 현존 중국 최대 규모의 궁원이다. 산장은 산을 등지고 호수에 임하여 있으며 산들이 기복하여 궁전의 정자들을 가리며 풍광이 활달하였다. 산장의 궁벽이 산을 의지하여 둘러쳐 있었다. 외팔묘는 여러 개의 별이 달을 둘러싼 형세로 피서산장의 북쪽과 동쪽에 위치한 산의 기단을 따라 건설되었다. 이들 사묘는 각 사묘마다 독특한 형태를 취하였는데 한족·장족·몽골족의 민족적 조형예술을 융합한 형태였다.
승덕은 청조 황제가 더위를 피하고 수렵을 즐기기 위한 지방이었을 뿐 아니라 그곳에 자리한 행궁에서 황제는 국가의 정치·군사·민족 문제 등을 처리하였는데 특히 변방 민족 관련 사무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청 황제는 일정 시간 피서산장과 목란위장 및 외팔묘에서 봉상·조견·수렵 그리고 종교 활동을 거행하여 소수민족들의 지배자들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여 청 왕조와의 통일과 단결을 유지하게 하였다.
일찍이 강희제가 열하 36경에 대한 시를 남겼으며 뒤에 건륭제 역시 그에 대한 시를 남겼다. 열하의 장서루(藏書樓)와 문진각(文津閣)은 1794년에 건설되어 일찍이『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과 『사고전서(四庫全書)』를 보관하였다. 1961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청의 멸망 이후 ‘열하’라는 명칭은 지역의 행정 단위 명칭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하북성(河北省)·요녕성(遼寧省)·내몽골 자치구의 교차 지점에 위치하였던 열하성은 1914년 2월부터 구획되었다가 1955년 7월 30일 폐지되었다.
위치 비정
하북성 승덕시 북부 무열하 서쪽 일대의 좁고 긴 골짜기 위에 위치한다. 서쪽은 몽골고원의 일부분이다. 남쪽에는 난하(滦河)가 있다. 동남쪽으로 대릉하와 소릉하가 있다.
관련 기록
박지원(朴趾源)이 남긴 여행기인 『열하일기(熱河日記)』가 있다. 박지원은 1780년(정조 4)에 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는 사행에 자제군관(子弟軍官)의 신분으로 동참하였다. 8월 초 드디어 북경에 도착한 사절 일행은 건륭황제의 특명을 받고 열하에 갔다가 북경을 거쳐 그해 10월 말에 귀국하였다. 조선의 사절들이 열하에 간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사절단은 열하의 사정을 보고하였는데, 특히 열하에서 열렸던 놀이의 대본과 형식에 대해서 상세히 보고하였다(『정조실록』 4년 11월 4일).
참고문헌
- 史爲樂 主編, 『中國歷史地名大辭典』,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5.
- 구범진, 「조선의 건륭 칠순 진하특사와『열하일기』」, 『인문논총』 70,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