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궁(衍禧宮)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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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연희궁 |
한글표제 | 연희궁 |
한자표제 | 衍禧宮 |
상위어 | 이궁(離宮) |
동의어 | 서이궁(西離宮), 연희궁(延禧宮) |
관련어 | 영빈묘(暎嬪墓) |
분야 | 왕실/왕실건축/궁궐건축물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정정남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연희궁(衍禧宮)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2년 1월 2일, 『세종실록』 2년 2월 25일, 『세종실록』 2년 3월 28일, 『세종실록』 2년 11월 17일, 『세종실록』 3년 1월 9일, 『세종실록』 7년 8월 30일, 『세종실록』 8년 8월 22일, 『영조실록』 40년 9월 3일, 『세종실록』 27년 1월 28일 |
조선전기에 한양 도성 서쪽 밖에 건립된 이궁.
개설
연희궁(衍禧宮)은 1420년(세종 2)에 도성 밖 서쪽 무악산 아래에 건립된 이궁(離宮)으로 서이궁(西離宮)이라 불리다가 1425년(세종 7)에 연희궁으로 당호를 바꾸었다. 연희궁(延禧宮)으로도 기록되었는데, 주로 조선전기에 왕들이 피어(避御) 목적으로 사용하였다. 연희궁은 1764년(영조 40)까지 유지되다가 해당 터에 영조의 후궁이며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인 영빈이씨(暎嬪李氏)의 묘역을 조성하면서 폐지되었다.
위치 및 용도
연희궁이 있었던 곳은 현재 연세대학교 학생회관 근처로 추정할 수 있다. 왕이 재액(災厄)을 피하기 위해 정궁(正宮)을 떠나 머무는 이궁으로서 기능했다.
변천 및 현황
연희궁은 왕의 재액을 피하기 위하여 방위를 달리한 곳에 궁을 조성하는 고려시대부터의 전통에 따라 건립된 이궁이다. 연희궁이 지어진 무악산 아래는 하륜(河崙)에 의해 도읍을 세울 만한 명당(明堂)으로 지목받았던 터라 태종이 이를 염두에 두어 1420년에 이궁 건립을 명하였다. 왕의 어소였지만 검소함을 받드는 의미에서 100칸 정도의 규모로 짓게 하였다(『세종실록』 2년 1월 2일). 서이궁이 완성된 것은 같은 해 11월이었다. 그동안 태종과 세종은 조성소(造成所)에 나가 선온(宣醞)을 내리기도 하고, 역사를 지켜보기도 했으며, 완성된 후에는 뒤쪽 언덕에 소나무를 심게 하였다(『세종실록』 2년 2월 25일)(『세종실록』 2년 3월 28일)(『세종실록』 2년 11월 17일)(『세종실록』 3년 1월 9일).
서이궁이라는 이름을 연희궁(衍禧宮)으로 고친 것은 1425년이다(『세종실록』 7년 8월 30일). 세종은 이후 문종에게 정치를 맡기고 이곳에서 기거하였다(『세종실록』 8년 8월 22일). 1505년(연산군 11)에는 연희궁을 수축하여 연회장으로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수리와 수축을 반복하며 이궁으로써 기능하였지만, 1764년에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이씨의 묘를 연희궁 터에 조성하면서 폐지되었다(『영조실록』 40년 9월 3일).
해당 지역에 영빈묘가 조성되고 연희궁은 훼철되었지만 해당 지역은 정조대에 북부(北部) 연희방(延喜坊) 연희궁계(延禧宮契)로 편제되어 연희궁이 있었음을 증명하였다. 1969년에 영빈이씨의 묘는 서오릉에 이장되었고 해당 터 주변에는 연세대학교 학생회관이 건립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연희궁에는 유독 뱀과 벌레가 많았다. 1445년(세종 27)에 세종은 세자에게 왕위를 양위하고자 연희궁에 나가 지냈다. 대신들은 연희궁에 뱀과 벌레가 많아서 여름을 지내기 어려우니 초수리(椒水里)나 개성(開城)으로 옮길 것을 권하였지만, 세종은 이를 듣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뱀과 벌레가 많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안심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건물을 수리하기로 마음먹고 수리하는 동안 인근에 있는 희우정(喜雨亭)에 나가 머물렀다(『세종실록』 27년 1월 28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 『독립신문(獨立新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