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화문(경희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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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집경당의 오른쪽 남쪽 행각에 있던 문.

개설

경희궁의 연화문(延和門)은 문헌에서 수없이 많이 나오지만 정확히 어느 권역의 문인지는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집경당의 오른쪽 남쪽 행각에 있던 문으로 추정된다.

위치 및 용도

창경궁의 연화문은 영조가 지은 개인 문집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어제속집경당문집(御製續集慶堂文集)』 안에 “경희궁 연화문 안 동쪽에 사알방이 있는데 이곳은 내가 7년간 시탕하는 중에 거처하며 머물던 장소이다.”라고 하였다. 또 『승정원일기』 1770년(영조 46) 4월 14일의 기록에 왕이 예방 승지를 불러 지금의 사알방은 예전에 중형을 시탕하던 장소여서 슬픈 마음이 일어난다 하며, ‘억석와’라는 글자를 써 주고 판각하여 걸라고 명했다. 이는 경희궁의 회상전과 집경당의 남쪽에 있던 억석랑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이곳이 사알방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연화문은 집경당의 오른쪽, 즉 남쪽 행각에 있던 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성록』의 기록에 왕세손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어 입고 여를 타고 연화문에 나아가 뒤를 따르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집경당 안으로 들어가 하례를 받고 예를 행하였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영조대에는 연화문에서 조참(朝參)을 행하고, 각종 제사에 쓸 향을 지영(祗迎)하고, 연화문에 전좌하여 지방의 수령들을 만나고, 양민들에게 쌀과 베를 내려주며 농사의 형편을 묻기도 하였다. 이뿐 아니라 노인들을 연화문으로 불러 음식을 베풀기도 하였다(『영조실록』 47년 4월 19일).

한편 창덕궁과 창경궁에 각각 같은 이름의 문이 있었는데, 모두 담장에 속한 솟을문으로 사주문(四柱門)의 형태였다.

변천 및 현황

연화문은 경희궁이 창건되던 때에 함께 조성되었으나, 1829년(순조 29)의 화재로 집경당·회상전 등의 주요 전각과 함께 소실되었다가 1831년(순조 31)에 복원되었다. 이때 연화문도 함께 복원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경희궁의 훼철이 시작되며 함께 사라졌다.

형태

경희궁의 연화문은 현재 형태가 확실히 확인되지 않는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궤(昌德宮萬壽殿修理都監儀軌)』
  • 『궁궐지(宮闕志)』
  • 『어제속집경당문집(御製續集慶堂文集)』
  • 안장리, 「영조궁궐인식의 특징」, 『정신문화연구』 제29권 3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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