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학생도(譯學生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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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사역원과 지방 관서에서 역학을 공부하던 학생.

개설

역학생도(譯學生徒) 교육은 서울에서는 사역원, 지방은 8도 군현, 즉 부(府)·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의 관아에서 실시하였다. 역학생도는 취재와 역과를 통해 역관직에 진출하였다.

담당 직무

역학 교육을 담당한 기관은 사역원이었다. 1393년(태조 2)에 고려의 제도를 따라 사역원을 설치하고, 여러 나라의 말을 통역하는 일을 맡아 사대교린 업무를 관장하도록 하였다(『태조실록』 2년 9월 19일). 사역원은 역학 행정 및 역학 교육의 중추기관으로 경관직 정3품 아문이다. 현재의 종로구 적선동과 도렴동에 걸쳐 있었는데, 그 규모는 동서가 23칸(間), 남북이 24칸으로 대청(大廳)·상사당상청(常仕堂上廳)·한학전함청(漢學前銜廳) 등 30여 개의 청이 있는 거대한 관사였다.

국가 간의 관계가 중요했기 때문에 사역원에서는 한학(漢學), 몽학(蒙學), 왜학(倭學), 여진학(女眞學) 곧 청학(淸學) 교육을 실시하였다. 통역과 번역을 담당해 부경사행(赴京使行)이나 통신사행(通信使行)을 수행하고 과거와 취재시험 등을 관장하였다. 교수직으로 한학교수(漢學敎授) 2명, 한학훈도(漢學訓導) 4명, 몽학·왜학·여진학 훈도 각 2명을 두었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교수나 훈도의 자격을 보면, 교수는 정3품 훈상당상(訓上堂上), 종4품 첨정(僉正), 정5품 도사(都事) 등을 지내고 교회(敎誨) 등 경험이 많은 사람을 임명했고, 훈도는 참상관이나 교회 중에서 임명하였다.

사역원에는 80명의 역학생도가 있었다. 어학별로는 한학 35명, 몽학 10명, 여진학 20명, 왜학 15명으로 한학의 비중이 높았다. 그 밖에 한학은 평양·의주·황주에서 90명, 왜학은 제포·부산포·염포에서 26명, 여진학은 의주·창성·북청·이산·벽동·위원·만포에서 40명 등 모두 156명의 지방생도를 대외 관계가 빈번한 지역에서 육성하였다(『세종실록』 19년 8월 25일). 외국 사신 영접과 역학생도 교육을 위해서 황해도 황주, 평안도 평양과 의주에는 한학훈도를 배치하였으며, 경상도 제포와 부산포에는 왜학훈도를 배치하였다. 몽학은 다른 어학과 달리 중앙의 사역원에서만 교육이 이루어졌다.

변천

역학생도 규정은 시대의 흐름과 수요를 반영하여 『속대전』에 이르러 바뀌었다. 지방 역학생도의 변화를 보면 제주에 한학생도 15명과 왜학생도 15명, 거제에 왜학생도 15명을 신설하였다. 반면에 10명의 왜학생도가 있었던 제포와 염포는 폐지하였다. 156명에서 45명이 추가되고 20명이 줄어, 결과적으로 전체의 정원은 25명이 늘어났다. 그래서 전체 지방 역학생도는 181명이 되었다. 사역원의 역학생도 정원은 전공별로 모두 늘어났다. 한학생도는 40명이 늘어 75명, 몽학생도는 25명이 늘어 35명, 왜학생도는 25명이 늘어 40명, 청학생도는 34명이 늘어 54명이 되었다. 사역원의 역학생도 전체로는 80명에서 204명으로 늘어났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통문관지(通文館志)』
  • 원영환, 「조선시대의 사역원제도」, 『남계조좌호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1977.
  • 이남희, 「조선후기 잡과교육의 변화와 특성」,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13-1, 2014.
  • 이동기, 「조선후기 중인교육연구」,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8.
  • 이성무, 「조선초기의 기술관과 그 지위」, 『혜암유홍열박사화갑기념논총』, 1971.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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