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유간보(魚游澗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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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북도 경성부에 속한 보(堡).

개설

어유간보는 함경북도에서는 내지에 해당하는 경성에 속한다. 처음에는 경원(慶源)으로 이속되었으나 이후 다시 경성(鏡城)에 환속되었다. 처음에는 구자(口子)가 설치되어 권관(權管)을 두었으나 세조대에 여진족의 공격을 받은 뒤 보를 축조하고 병마만호(兵馬萬戶)가 절제하도록 했다. 선조대에는 여진의 동향에 영향을 받아 북병사의 본영을 강화하기 위해 첨절제사를 두게 된다. 어유간보는 1877년(고종 14)에 폐지되었다.

위치 및 용도

어유간보는 함경북도의 대도호부(大都護府)이자 병마절도사의 본영이 있는 경성부의 속진으로 용성사(龍城社)에 위치한다. 그 명칭은 인근에 위치한 어유간천(魚游間川)에서 유래했다. 어유간보는 경성의 북쪽 35리(약 13.7㎞)에 있었으며, 병마만호를 두어 절제하게 하였다가 나중에 첨절제사로 승격하였다. 함경북도 이남의 3개 읍인 경성, 길주(吉州), 명천(明川)은 유사시 육진과는 별도로 삼위(三衛)로 분군(分軍)하는데, 길주가 중위(中衛), 명천이 우위(右衛), 부령(富寧)이 좌위(左衛)가 된다. 어유간보의 만호는 좌위에 소속되어 우부장(右部將)이 된다. 함경북도와 함경남도를 통해서 강원도와 경기도로 이어지는 길목을 방어했다.

변천 및 현황

어유간은 본래 함경북도 경성의 어유간천 인근을 가리켰다. 어유간천 이북은 용성(龍城)으로 이 지역의 백성들은 1426년(세종 8) 새로 설치한 경원을 방어한다는 목적으로 이에 합속되었다(『세종실록』 8년 6월 16일). 이로 인해 120호의 백성들이 경원에 속하게 되고, 경성에는 길주와 명천의 백성들이 다시 옮겨졌다(『세종실록』 12년 10월 29일). 어유간은 다시 경성부로 합속되었는데,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451년(문종 1)에 어유간이 경성에 속한 지역으로 언급된 점으로 미루어 육진의 개척이 어느 정도 정비된 문종 연간 전후로 여겨진다(『문종실록』 1년 5월 5일). 어유간에는 구자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1460년(세조 6) 여진족의 침입을 받은 이후에 농보(農堡)의 축조가 결정되었다(『세조실록』 6년 3월 13일). 어유간구자는 경성의 북쪽 60리에 있었는데, 여진족의 약탈에 취약하고 거주민이 많다는 이유로 경성부의 북쪽 35리로 보를 옮겨 설치하였고 병마만호를 두었다(『세조실록』 7년 5월 8일). 1489년(성종 20)에는 어유간에 둘레 1,109척(약 336.1m), 높이 15척(약 4.5m)의 석보를 설치하였다(『성종실록』 20년 3월 30일).

어유간은 만호의 보에서 첨절제사의 진으로 승격하게 되는데 그 분명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1607년(선조 40)에 조광익(趙光翼)이 어유간첨사로 임명된 기록이 있다(『선조실록』 40년 5월 26일). 이보다 앞서 1607년(선조 40) 북병사이시언(李時言)이 건주여진(建州女眞), 홀라온(忽剌溫) 등 여진의 동향과 관련하여 어유간·보을하(甫乙下)·무산(茂山)·부령(富寧) 등의 병력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으로 미루어, 어유간첨사의 설치는 이 시기 복잡하게 전개된 북방의 정세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선조실록』 40년 4월 4일).

어유간진은 숙종대 함경도관찰사를 지낸 남구만(南九萬)이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으나, 별다른 제도상의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그리고 1877년(고종 14) 북도안무사(北道安撫使) 김유연(金有淵)의 요청에 따라 주을온보(朱乙溫堡)·오촌보(吾村堡)와 함께 철폐되었고, 소속 병력과 물자는 조산(造山)·아산(阿山)·안원(安原)·황척파(黃拓坡) 등 4개의 보로 이속되었다(『고종실록』 14년 2월 25일)(『고종실록』 14년 7월 5일).

형태

어유간보는 돌로 축조된 석보로서 1489년(성종 20)에 축조되었는데 둘레가 1,109척, 높이가 15척이었다(『성종실록』 20년 3월 30일). 둘레와 높이는 기록마다 다른데, 둘레가 1,089척 혹은 1,700척, 높이가 8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어유간보는 실측으로 둘레 329m, 높이 2.4m 정도로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조사 결과에 따르면 동서로 긴 장방형이며 둘레는 약 600m, 높이는 5~6m이다. 방어 시설로는 여장(女墻) 79개, 옹성(甕城) 2개, 곡성(曲城) 2개가 있고, 동쪽과 남쪽에 각각 한 개씩의 문이 있으며, 보 안에 1개의 우물과 1개의 창고가 있다. 처음에는 어유간보 응봉봉수(鷹峯烽燧)가 있었고, 이후에 어유간보 이순덕봉수(李順德烽燧)를 북쪽 20리(약 8㎞)에 추가로 설치하였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제승방략(制勝方略)』
  • 『여지도서(輿地圖書)』
  • 『만기요람(萬機要覽)』
  • 『조선향토대백과』, 사단법인 평화문제연구소, 2008.
  • 강신엽, 「南九萬의 國防思想」, 『民族文化』14,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