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면보(魚面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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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 삼수군에 설치하여 만호가 지휘하던 군사시설 보(堡).

개설

함경도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진보를 설치하여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고 지역사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어면보가 소속돼 있는 삼수군은 조선초기 본래 갑산군(甲山郡)의 삼수보였는데, 만호(萬戶)를 두어 방어를 담당하게 하였다. 1446년(세종 28) 삼수보가 적의 침입 경로에 요해처가 된다 하여 군(郡)을 설치하고 함흥부(咸興府)의 관할로 삼았다. 지군사(知郡事) 1인이 배속되어 함흥도우익병마(咸興道右翼兵馬)도 겸하였다. 어면보는 삼수군에서 강계부(江界府)나 함흥부로 내려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교통로에 위치하였다. 따라서 내지로 진입하는 적을 막아야 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위치 및 용도

삼수군 중심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어면강 변에 위치하였다. 어면보 위로는 자작구비(自作仇非)가 있었으며, 아래로는 신방구비(神方仇非)·별해(別害) 등 내지(內地)로 가는 요충지가 있었다. 삼수군의 압록강 요해처는 크게 삼수동구(三水洞口)와 나난보(羅暖堡)가 있었다. 대규모 적이 압록강을 건너 침입했을 때 삼수군의 읍치를 지나 남쪽으로 내려가기 위해 지나는 곳이 어면보였다. 따라서 어면보의 역할은 유사시에 도로를 차단하고 적군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또한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평시에는 삼수군 국경을 왕래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어면보는 봉수를 관리하며 위급한 소식을 남쪽에 전달하는 역할도 하였다. 어면보가 관리하는 봉수는 용봉(龍峯)이었는데, 용봉에서 시작한 봉수는 함경도 단천군(端川郡)까지 전달되었다.

변천 및 현황

어면보는 1499년(연산군 5) 처음 설치되었다. 어면보를 설치하면서 삼수군에서 어면보까지 가는 새 길을 개통하였는데, 중간에 다섯 곳의 큰 고개를 넘어야 했다. 높고 험준하여 발을 붙이기가 어려워 군사들이 말을 타거나 짐을 싣고 갔다 살아서 돌아온 사람이 적다고 할 정도였다. 또한 어면보는 농사지을 땅이 없어서 거주하는 백성들이 전혀 생계를 이어갈 수 없었다. 이에 삼수군 백성들은 어면보를 이전 후주(厚州) 지역으로 옮겨줄 것을 청하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6년 10월 5일). 그러나 지리적 중요성으로 인해 어면보는 그대로 유지되었고, 1502년(연산군 8)에는 추가로 도로를 개설하기로 결정하였다(『연산군일기』 8년 7월 17일). 그러다가 1674년(숙종 즉위) 함경도관찰사남구만(南九萬)의 요청에 따라 어면보는 후주로 옮겨졌다(『숙종실록』 즉위년 10월 8일).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여지도서(輿地圖書)』
  • 『만기요람(萬機要覽)』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강석화, 「조선후기 함경도 육진지역의 방어체제」,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강신엽, 「南九萬의 國防思想」, 『民族文化』14, 1991.
  • 고승희, 「함경도 내지 진보의 변화」,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노영구, 「조선후기 함경남도 간선 방어체계」,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오종록, 「조선초기 양계의 군사제도와 국방체제」, 고려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