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류산성(御留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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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문경시의 조령에 설치한 관방 시설.

개설

어류산성은 문경(聞慶)조령(鳥嶺)과 죽령(竹嶺)의 길목에 위치한 산성(山城)으로 고려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설치 연대는 분명하지 않다. 조선시대에 이 산성은 수축되지 않았고, 다만 조령의 관문 등이 중시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도순변사(都巡邊使)신립(申砬)이 조령 등을 버리고 후퇴한 사실을 비판한 류성룡(柳成龍)은 조령과 죽령 등의 방어를 중시했다. 그는 수차례 어류산성의 존재를 강조하고 수축을 논의했다. 어류산성의 수축은 병자호란 이후인 1638년(인조 16)부터 현종대, 숙종대에 이르기까지 수차례 논의되었으나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어류산성은 조선시대에는 활용되지 못한 산성이었다.

위치 및 용도

어류산성은 문경의 북쪽, 조령의 남쪽에 위치했다. 동쪽으로는 태백산·소백산과 이어져 있고, 북쪽으로는 월악산과 통하며, 서쪽으로는 백화산과 접하여 그 줄기가 속리산·덕유산·지리산(智異山)으로 연결되었다. 또 북쪽으로는 강원도와 이어졌고, 서쪽에는 충주가, 동쪽에는 안동·풍기·영주가 있으며, 남쪽과 북쪽으로 각각 낙동강과 한강이 이어졌다. 이렇게 어류산성은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3도는 물론 강원도와 경기도를 이어주는 요충지에 있었다.

인조대 어류산성의 개축을 강하게 주장한 이경여(李敬輿)는 상소에서 서북쪽에서 일이 발생하면 어가(御駕)가 머물 수 있고, 남쪽에서 일이 발생하면 관방의 중진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어류산성은 적의 공격을 막고 보호해주는 보장(保障)으로서의 기능과 남쪽에서 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을 차단하는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어류산성의 수축은 실행 단계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변천 및 현황

어류산성은 고려 태조 혹은 그 이전에 축조되었다고 전해지는데, 분명한 시기는 알기 어렵다. 어류산성의 본격적인 수축 논의는 1638년(인조 16)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인 임진왜란 당시 재상이었던 류성룡이 조령의 방어 실패를 통탄스럽게 여겨 어류산성의 수축을 수차례 주장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정치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어류산성은 버려졌다.

최현(崔晛)의 행장(行狀)에는 그가 양남순무어사(兩南巡撫御史)가 되어 어류산성의 형세를 살피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최현은 이에 앞서 건주여진(建州女眞)의 성장에 따른 평안도의 방어가 중시될 때, 역시 관서어사(關西御史)로서 압록강 변은 물론 내지의 관방시설을 총체적으로 확인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그는 성곽 제도에 밝은 인물이었다. 최현이 양남순무어사로 임무를 수행한 시점은 1611년(광해군 3)이었으므로 어류산성이 관방시설로서 지속적인 관심을 받아왔음을 알 수 있다.

어류산성의 중요성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은 1638년(인조 16)이었다. 병자호란 직후 일본에서 군사적 원조를 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는데 조선은 이를 침략 의도로 이해했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는 통신사(通信使)를 보내 전후 사정을 설명하자는 주장마저 일각에서 제기되었고, 군사적 대비책을 강화하자는 주장도 나타났다. 부제학이경석(李景奭)은 ‘조령은 남쪽 관문(關門)의 요충지이고, 어류산성은 험하기가 비할 데 없는 곳’이라면서 인근 읍의 백성들이 이곳을 중시하므로 수축할 것을 주장했다(『인조실록』 16년 1월 26일). 인조가 이경석의 의견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어류산성의 축조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어류산성의 축조에 대한 이경석의 언급은 자신의 생각이 아니었다. 1638년 1월 26일 자의 『비변사등록』기사를 확인하면 이경석은 경상도관찰사이경여의 생각을 대변한 것이었다. 이경여는 당시 어류산성이 조령의 험고한 곳을 점거하고 있어 길목을 차단할 수 있고, 인근 군읍(郡邑)의 백성들이 입보(立保)할 의사를 이미 가지고 있었음을 주장했다. 이경석은 이경여의 주장을 받아들여 조령과 죽령 일대를 지키기 위한 방책으로 어류산성의 축조를 강조한 것이었다.

어류산성의 축조는 순조로이 진행되지 못했다. 어류산성의 축조를 주장하던 경상도관찰사이경여는 병든 모친을 모시기 위해 사직을 요구하여 체차된 상태였다. 또 이경석의 주장에 대해 비변사는 ‘어류산성을 수축하고 들어가서 수비하는 일은 고(故) 상신(相臣) 류성룡이 누누이 말했던 것’이라 하여 동조하면서도 어려운 공역인 만큼 좌의정이 돌아온 뒤에 의논하여 처리할 것을 주장했다. 당시 좌의정 최명길(崔鳴吉)은 청의 징병 요구를 교섭하기 위해 심양에 가 있었으므로 비변사는 어류산성의 축조를 우선 보류한 것이다. 또 이경여의 후임으로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된 이경증(李景曾)이 민력이 고갈되어 어류산성의 역사(役事)를 일으키기 어렵다고 반대하였다. 이에 인조는 이경증에게 형세를 살피어 다시 아뢸 것을 지시하였다(『인조실록』 16년 2월 7일).

이경여는 한양으로 돌아와 상소하여 어류산성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는 어류산성은 내부가 넓고 수원(水源)이 충분할 뿐만 아니라, 형세가 험하고 견고하여 오히려 남한산성보다 좋다고 주장했다. 또한 남한산성보다 험할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암석이 많아 적은 힘으로 공격하기 어려운 성을 구축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경여는 어류산성을 축조할 경우, 남변에 경보가 있으면 관방 시설로 활용할 수 있고, 서북변에 경보가 있을 경우 어가가 머물 주필지(駐蹕地)로도 삼을 수 있어 인심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그 이후 이경증은 경상좌우도의 병마절도사김응해(金應海)와 문희성(文希聖)을 대동하여 자세히 살펴보았고, 어류산성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이경여의 주장에 동의하였다. 인조는 이경증의 장계를 비변사에 내렸고, 공역의 크기와 민력의 분정을 헤아려서 완전한 논의의 일치를 보아야 한다는 회계를 받았다(『인조실록』 16년 3월 5일).

어류산성의 축조는 우선 합의에 도달했다. 이경증은 관찰사로 하여금 승군(僧軍)의 장수를 가려 뽑아 중들을 모집해서 사찰을 창건하고 공역의 여건을 마련한 뒤에 투입할 역군과 식량을 헤아리자고 하였다. 조경남의 『속잡록』에는 이해 4월부터 승군을 조발하여 어류산성의 축조를 시작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6월 비변사의 계사에 따르면 이때의 축조는 성안에 사찰을 건립하는 준비 단계에 지나지 않았음이 확인된다. 성의 지세가 험하여 공역이 어렵고, 인가가 없으며 양곡의 운반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신임 경상도관찰사이명웅(李命雄)에게 다시 성의 형세를 살펴보라는 지시가 내려졌다(『인조실록』 17년 6월 19일).

이명웅은 이해 8월에 장계를 올려 여러 산성의 형세를 살핀 결과 어류산성을 공산성(公山城)·독음산성(禿音山城)과 함께 축조하면 앞뒤에서 적을 몰아칠 수 있는 의각지세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인조실록』 17년 8월 19일). 어류산성은 전략적 가치, 민력의 고갈 수준 등을 포괄적으로 고려한 끝에 수축이 결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끝내 어류산성의 수축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시방(李時昉)이 수어사(守禦使)로 재임하던 시기에 충주의 병력을 남한산성에 소속시켰음은 이를 반증한다. 경기 지역의 보장(保障)을 강화하기 위해 조령의 길목을 지켜야 할 병력의 소속을 옮겼다는 사실은 어류산성보다 남한산성을 중시했음을 의미한다. 1673년(현종 14) 2월 수어사이완(李浣)은 이를 지적하면서 어류산성에 관방을 설치하고 남한산성에 소속된 충주 군사 3,900명을 이속시키자고 건의했다. 현종은 남한산성의 방어 대안을 물었고, 이완은 각기 해당 지역의 군사가 해당 지역의 관방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현종개수실록』 14년 2월 30일).

1676년(숙종 2)에 이르러 함창의 유학 이상백(李尙白)이 올린 상소로 인해 조령 일대의 관방이 다시금 논의되었다. 이해 11월 4일 자의 『승정원일기』 기사에서 확인되는 그의 상소에는 고성(古城)의 유지(遺址)가 있는데 하늘이 만든 험한 땅이라고 하면서 ‘노인들이 서로 어류성(御留城)이라고 칭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비변사는 어류산성의 전략적 이점을 설명하면서 역시 이를 ‘유지’ 즉 ‘옛 터’라고 표현하고 있어 현종대 이완의 논의도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때 비변사에서는 거진(巨鎭)을 설치하여 어류산성을 관리하고 동남 지방의 보장으로 삼자고 주장했다(『숙종실록』 2년 11월 4일).

1684년(숙종 10)에는 남구만(南九萬)이 어류산성에 대해서 ‘고 상신 이경여가 일찍이 이 성을 수축할 것을 청하였으니, 또한 반드시 의견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숙종은 그 타당성을 관찰사에게 묻고 다시 명을 받아 처리하라고 하였다(『숙종실록』 10년 9월 11일). 이는 인조대 이경여가 어류산성의 수축을 주장한 이래 허다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진행되지는 못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남구만의 의견은 『비변사등록』에 자세히 보이는데, ‘풍기와 순흥 두 고을을 한 고을로 만들고 어류산성을 수축하게 할 것’을 주장했다. 이 논의의 결과에 대해서는 안정구(安廷球)의 『재향지(梓鄕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비변사의 주장대로 경상도관찰사윤지완(尹趾完)이 1685년(숙종 11) 2월 20일에 어류산성의 형세를 살펴보고, 산성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함으로서 순흥과 풍기를 합병하는 논의가 중지되었다.

어류산성의 수축에 대한 주장은 1706년(숙종 32)에 다시 한번 진행되었지만 끝내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여지도서』는 어류성을 ‘소백산고성(小白山古城)’의 다른 이름이라고 언급하면서 ‘어느 시대에 설치되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고 하고, 『대동지지(大東地志:)』는 아예 ‘혁폐(革弊)’, 즉 ‘혁파하여 폐지하였다’라고 기재하고 있다. 이는 어류산성이 인조대 이래로 그 전략적 가치를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축조는 진행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형태

어류산성은 산꼭대기에 위치한 테뫼식 산성으로 『여지도서』와 『재궁지』에는 그 둘레가 1,428자(433m)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기록들은 모두 어류산성을 고성(古城)으로 표기하고 있고, 성 자체가 산 정상을 두르고 있다기보다는 천연 암벽에 기대어 있어 실제 규모는 이와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성터의 일부가 확인되며, 예전에는 궁실(宮室)의 터도 확인되었다고 한다. 성벽 위에는 성가퀴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안에 우물과 샘이 많아 물이 풍부했고, 또 많은 군사를 수용할 수 있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여지도서』의 「문경현지(聞慶縣誌)」에 따르면 어류산성은 고려 태조왕건(王建)이 후백제의 견훤(甄萱)을 공격할 때 축조한 것이라고 한다. 또 고려 말에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을 피해 잠깐 머물렀다고도 한다. 『속잡록』에는 ‘삼국시대에 어떤 임금이 주필(駐蹕), 즉 잠시 머물러 쉬었던 곳’이라고 했는데 ‘임금이 머물렀던 곳’이라는 의미를 가진 ‘어류(御留)’라는 명칭은 여기서 유래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만기요람(萬機要覽)』
  • 『재향지(梓鄕誌)』
  • 『백강집(白江集)』
  • 『속잡록(續雜錄)』
  • 안태현, 「문경새재 어류산성에 대하여」, 『학예지』13, 육군박물관, 2006.
  • 차용걸, 「조령관방시설에 대한 연구(1)」, 『사학연구』32, 한국사학회,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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