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진(楊花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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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마포나루 일대에 위치하며 조선시대에 삼진(三津)의 하나였던 나루.

개설

한양에서 양천(陽川)을 지나 강화로 가는 조선시대 주요 간선 도로상에 위치하였던 교통의 요지였다. 양화도(楊花渡) 혹은 양화나루라고도 불렸다. 삼남 지방에서 한강을 통하여 운송되어 오는 곡식을 저장하던 다섯 강 중의 하나로 농산물의 재분배 기능을 담당하던 중요 지역이었다. 또한 서울의 방어선을 이루는 한강의 중요 지역으로, 진대를 마련하고 장수를 배치해 이 지역을 방어하도록 조치했다. 결국 조선시대에 교통과 경제, 군사상의 주요 기능을 담당한 중요한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변천 및 현황

양화진은 처음에는 나루를 관리 및 방어할 관원으로 도승(渡丞)이 배치되었으나 뒤에는 별장(別將)으로 바뀌었으며, 호조의 점검청(點檢廳)이 있었다. 어영청에서 나루터를 관할했다. 양화진에 속한 선박은 모두 10척이었다.

이 지역은 한강 가운데에서 경치가 아름답고 정자가 많기로 이름난 곳이었다. 그리고 삼각산·목멱산·한강과 함께 기우제를 지내던 중요한 장소였다. 기우제 이외에도 양화진 근처에는 처형장이 위치하고 있어 양화진 일대에서 형이 집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고종의 재위기에 양화진 근처 잠두봉(蠶頭峰) 아래 새남터에 처형장을 설치하고 많은 수의 천주교인들을 처형했다. 김옥균(金玉均) 역시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1966년 순교 100주년을 기념해 한국천주교에서는 절두산순교기념관을 세웠고, 2000년에 절두산순교박물관으로 개명했다.

양화진은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관할하에 있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에 속했고, 해방 후 서울에 편입되면서 서대문구에 속했다. 1944년 서대문구에서 분할되어 마포구가 신설될 때 마포구에 속하여 현재까지 이르게 되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조선초기에는 기우제를 지내는 중요한 장소였다. 당시 기우제는 주로 흥복사에서 진행되었는데, 그 외에도 서울의 삼각산·목멱산·한강·양화진에서도 비를 빌었다(『세종실록』 2년 4월 17일). 또한 비를 빌기 위해 호랑이 머리를 양화진에 넣어서 비를 기원하던 의례를 진행하기도 했다(『세종실록』 7년 6월 19일)(『세종실록』 17년 7월 28일).

양화진에 관련된 가장 큰 사건은 1866년(고종 3)에 프랑스 군함이 양화진과 서강(西江)을 거쳐 강화부(江華府)까지 점령했다가 조선군에 의해 격퇴된 병인양요(丙寅洋擾) 사건이다.

당시 조선은 1866년 초에 흥선대원군이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려 프랑스인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 신자 수천 명을 처형했다. 이를 병인박해라 하는데, 이때 프랑스인 선교사는 12명 중 9명만이 처형을 면했다. 처형을 면했던 선교사 3명 중 1명이던 리델(Ridel)이 중국으로 탈출해 주중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魯勢], P. G. Roze)에게 박해 소식을 알리고 조선을 공격해줄 것을 요청했다.

로즈가 지휘하던 프랑스 함대의 제1차 원정은 강화해협을 중심으로 서울까지의 수로 탐사라는 목적을 표면적으로 내세우며 이루어졌다. 당시 로즈는 군함 3척을 이끌고 9월 18일부터 10월 1일까지 양화진과 서강까지 올라와서 지세와 수로 등을 세밀하게 살피고 지도 3장만을 만들고 돌아갔다.

프랑스 함대는 10월 5일 한강 봉쇄를 선언하고, 10월 11일에 제2차 조선원정에 나섰다. 당시 프랑스 함대의 규모는 군함 7척, 함재 대포 10문, 총병력 1,000명이었다. 이들은 처음에 강화부를 점령하고 뛰어난 화력으로 전투를 압도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 하지만 정족산성(鼎足山城)에서 양헌수(梁憲洙)가 이끄는 조선군에게 패배하면서 물러나게 되었다. 프랑스 군은 두 달에 걸친 원정의 피로와 정족산성에서의 패배 등으로 인해 전의를 상실하고 강화도에서도 철수하게 되었다. 이때 프랑스 군은 철수하면서 강화도에서 고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 등 문화재를 약탈해 갔다. 당시 약탈당한 문화재 반환 문제는 현재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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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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