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천현(陽川縣)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고려와 조선시대에 경기도의 양천현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양천현(陽川縣)은 고려 1018년(고려 현종 9)에 수주(樹州: 현 인천 부평)에 소속되었고, 1310년(고려 충선왕 2)에 지금 이름인 양천현으로 정해졌다. 조선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어 용인, 영평, 진위, 김포 등과 함께 현령 소재지가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후 1394년(태조 3)에 경기도를 좌·우도로 나눌 때 경기좌도에 소속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인천부 양천군으로 승격되었고, 이듬해에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양천현은 고려 1310년(고려 충선왕 2)에 지금 이름인 양천현으로 개칭되고 영(令)이 판견되었다. 조선 1414년(태종 14)에 김포·금천 등과 병합되었다. 1505년(연산군 11)에 현(縣)이 폐지된 것을 제외하고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양천을 관할하였다.

조직 및 역할

고려 문종 때 관제를 정하여 현에는 7품 이상의 현령을 두었고, 1354년(고려 공민왕 2)에 경관 7품 이하로 했다가 뒤에 안집별감으로 이름을 고쳐 5, 6품의 관리를 임명하였다. 창왕 때 다시 고쳐 현령이라 하고 품계는 그대로 5, 6품으로 하였다. 조선시대 『경국대전』의 양천현에는 현령과 훈도 각 1명을 두었다. 훈도는 지방 향교 교생의 지도를 위하여 생원·진사 중에서 임명하였으나, 무록관이기 때문에 가지 않으려고 피하는 사람이 많았다. 지방의 향약이 활발해짐으로써 조선후기에 모두 폐지시켰다.

변천

양천현은 1018년(고려 현종 9)에 수주에 소속되었고, 1310년(고려 충선왕 2)에 고을 이름이 양천현으로 개칭되었다. 1414년(태종 14)에 금천과 과천을 합쳐 금과(衿果)라 하고, 김포와 양천을 합쳐 김양(金陽)이라 하였다(『태종실록』 14년 8월 21일). 그러나 2개월도 안 되어 다시 과천이 현으로 독립됨에 따라 금천과 양천을 합쳐 금양현(衿陽縣)이라 하였고, 김포는 부평과 병합되었다. 1416년(태종 16)에 금천·양천·김포 등 합병한 군현을 다시 예전대로 복구하였다. 1505년(연산군 11)에 연산군이 이궁(離宮)을 세우고자 주민을 몰아내고 금표를 세우는 과정에서 양천현이 일시적으로 폐지되었다(『연산군일기』 11년 8월 21일). 반정으로 중종이 즉위한 후 양천현은 다시 복구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가 개편되어 전국이 23개 부 337개 군으로 바뀔 때 인천부 양천군으로 승격되었다. 이듬해에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시행됨에 따라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경기(京畿) 양천현(陽川縣)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차문섭, 「중앙집권적 정치구조」, 『한국사』10, 국사편찬위원회, 198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