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진창(楊津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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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충청도 충주에 설치되어 군향곡을 보관하던 창고.

개설

양진창(楊津倉)은 조선후기 충주에 설치되어 있던 환곡 창고였다. 이곳은 유사시 필요한 군향(軍餉)을 보관하던 창고였으므로 비변사가 관할하였다. 군향을 장기간 보관하기 위해서는 개색(改色)이라는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였다. 이를 위해서 곡물을 백성에게 분급해 주고 다시 징수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종의 이자 격인 10%의 모조(耗條)를 징수하였다. 양진창이 설치된 초기에는 일류이분(一留二分)으로 분급되었으나 이후 반류반분(半留半分)으로 운영되었다. 양진창은 군향을 보관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지만, 기근에는 진휼 창고의 역할도 담당하였으며 일부 재원은 충주목의 재원으로도 충당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669년(현종 10) 조정은 충주목 가흥창에 흉년에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할 목적으로 의창(義倉)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1683년(숙종 9) 전국의 방어 체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충주를 독진(獨鎭)으로 삼으려고 의창을 읍치에서 6~7리 떨어진 양진으로 옮기고 창고의 이름을 양진창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그 땅이 축축하고 곡식을 보관하기에 적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창고 근처에 모집한 백성도 흩어지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런 까닭에 1691년(숙종 17) 충주목사(忠州牧使)이국헌(李國憲)이 양진창을 읍치의 금천으로 옮기자고 요청하여 조정의 승인을 받아냈다(『숙종실록』 17년 윤7월 13일). 이로써 18세기 이후 양진창은 충주목 북문 안에 위치하게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양진창은 충주의 관방 체계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군량미를 보관하기 위하여 설치된 창고였다.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양진창은 충주성 북문 안에 위치하였고, 규모는 총 57칸이었다. 10월에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내고, 12월에 창고를 봉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보관된 곡물은 인근 도에 기근이 발생했을 때 진휼곡으로도 자주 전용되었다. 1691년(숙종 17)에는 10,000석을 경상도로, 1761년(영조 37)에는 500석을 경기로 보내 주기도 하였다(『숙종실록』 17년 1월 1일)(『영조실록』 37년 6월 25일). 이런 이유로 양진창은 아산의 공진창과 태안의 안흥창과 함께 충청도의 진휼곡을 보관하는 대표적인 진휼 창고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한편 18세기 이후로는 충주의 재정원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곡총편고』에는 양진창의 곡물을 환곡으로 운영하고, 그 모조 중 20%를 수령이 취용하고 있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변천

1669년(현종 10) 충주의 환곡 중 수천 석을 쌀로 바꾸어 모두 가흥창에 보관하였다. 1686년(숙종 12) 충주 양진의 동쪽에 창고를 세웠다가 다시 1750년(영조 26) 읍내로 이건하여 군적을 보관하였다. 양진창의 곡물은 1704년(숙종 30)만 하더라도 약 20,000석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환곡을 유용하고 거짓 문서를 꾸미는 번질(反作), 돈이나 물건을 유용하는 나이(那移) 등의 이유로 허류액이 늘어났다. 일례로 숙종 1696년(숙종 22)에는 강원도의 기근이 심하지 않는데도 2,000석을 이전하는 일로 조정에서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이런 이유로 1763년(영조 39) 영조는 이재간(李在簡)을 충원암행어사(忠原暗行御史)로 파견하여 곡물 장부를 조사하게 하였다. 그런데 6,000여 석의 곡물 중 실제 보유한 곡물은 16석에 불과하였다(『영조실록』 39년 4월 17일). 군향으로 비축한 양진창의 곡물이 감소하자 1787년(정조 11) 충청감사홍억(洪檍)은 선혜청의 대동저치미 4,000석과 상진청의 곡물 7,000~8,000석을 이획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의 의견은 일부 조정되어 정책에 반영되었다(『정조실록』 11년 12월 16일). 그 결과 19세기 전반 양진창의 규모는 16칸으로 줄어들고, 곡물량은 미 4,933석, 콩 8,869석 등 약 13,800석 가량이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곡총편고(穀摠便攷)』
  • 『만기요람(萬機要覽)』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