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현(陽智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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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경기도 수원부의 양지현을 관할하는 지방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양지현(陽智縣)은 본래 수주(水州: 현 수원)의 양량부곡(陽良部曲)이었는데, 1399년(정종 1)에 양지(陽智)로 이름을 고치고 현(縣)으로 승격되어 감무가 설치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지방제도를 개편하여 감무를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충청도에 속했던 양지는 1413년(태종 13)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경기좌도에 속하게 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충주부양지군(陽智郡)으로 승격되었고, 이듬해에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양지현은 1399년(정종 1)에 양지로 이름을 고치고, 현으로 승격되어 감무가 설치되었으며, 1413년(태종 13)에 비로소 감무가 현감으로 바뀌었다. 1628년(인조 6)에 유효립(柳孝立)의 역모에 가담한 조헌립(趙憲立)으로 인해 양지현의 읍호가 강등될 위기에 처했으나 역참이 있는 곳이라 하여 그대로 유지되었다(『인조실록』 6년 2월 13일).

조직 및 역할

조선초기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경국대전』에 따르면 양지현에는 현감 1명과 훈도(訓導) 1명이 있었다. 훈도는 지방 향교의 교생을 지도하기 위해 생원·진사 중에서 선택하여 임명하였는데, 조선후기에 모두 폐지시켰다. 『여지도서』에는 현감 아래에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15명, 아전 19명을 두었다. 좌수와 별감의 경우, 그 운영의 실제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그 임무는 수령의 자문에 응하고 풍기를 단속하며, 향리를 규찰하는 등 수령을 보좌하는 것이었다. 지방 양반 중에서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는 자를 추대하여 우두머리를 좌수, 차석을 별감이라 하여 수령이 임명하였다. 임기는 대개 2년이었다. 군관은 군사적인 실무를 담당하였고, 아전은 지방 관청의 하급 행정실무자로 이·호·예·병·형·공의 6방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변천

양지현은 조선 1399년(정종 1)에 지금의 이름인 양지로 개칭되어 현으로 승격되고 감무가 설치되었다. 고려 공민왕 때 안성 주민이 홍건적의 침입을 격퇴한 공로로 안성현을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키면서, 수원 소속의 양량부곡과 감미탄(甘彌呑)·마전(馬田)·신곡부곡(薪谷部曲)을 안성군에 이속시켰는데, 안성군에 속해 있던 양량부곡이 이때 현으로 승격된 것이다. 1413년(태종 13)에 지방제도를 개편하여 감무를 현감으로 고쳤다. 현의 치소를 광주의 추계향(秋溪鄕)으로 옮겼는데, 땅이 좁으므로 죽산의 고안(高安)·대곡(大谷)·목악(木岳)·제촌(蹄村)의 4부곡을 떼어 양지현에 편입시키고, 충청도 관할에서 경기도로 옮겨 소속시켰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가 개편되어 전국이 23개 부 337개 군으로 바뀔 때 충주부의 양지군이 되었다. 이듬해에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시행됨에 따라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용인군에 편입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경기(京畿) 양지현(陽智縣)
  • 『여지도서(輿地圖書)』경기도(京畿道) 양지현(陽智縣)
  • 차문섭, 「중앙집권적 정치구조」, 『한국사』10, 국사편찬위원회,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