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잠(養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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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를 사육하여 누에고치를 생산하는 일.

개설

양잠이란 누에를 키워 고치를 생산하는 일련의 과정을 가리킨다. 누에는 알, 애벌레, 번데기, 나방의 단계를 모두 거쳐 완전 탈바꿈하는 곤충으로서, 알로서 겨울을 난다. 그리고 봄이 되어 뽕잎이 피는 시기가 되면, 누에알에서 애벌레가 부화해 상엽(桑葉) 즉 뽕잎을 먹으며 성장해 고치를 짓게 되는 것이다. 고치에서 명주실을 생산한다.

연원 및 변천

양잠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불확실하다. 누에 사육이 처음 시작된 곳은 기후가 온난하고 뽕나무가 잘 자라는 아시아 중앙부로 추정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까지에 이미 화북(華北) 지방까지 양잠을 하고 있었고, 한국에서는 고조선 시대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 태종대 이후 양잠이 적극 장려되었다. 조정은 양잠에 적합한 곳을 물색하였고, 국가 공식의 잠실(蠶室)도 마련되었다. 여러 곳에 채방(採訪) 관리를 파견하여 명주실과 누에고치를 거두어들였고, 각 지방의 수령이 양잠을 적극 감독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런데 누에고치의 유일한 먹이인 뽕나무 식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양잠이 적극 추진되어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한편에서는 뽕나무가 잘 자라지 않는 지역 형편을 이유로 들면서 뽕나무가 무성하게 된 이후에 누에치기를 권장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국가는 왕비의 친잠의례를 행하면서 백성들에게 양잠을 적극 권장하였다. 친잠의례는 왕비가 내외명부의 여성들을 거느리고 잠실에 행차하여 함께 뽕을 따는 의식이었다. 이 의식은 만물이 자라기 시작하는 3월에 왕이 행하는 친경례와 함께 시행하였다. 조선전기에 경복궁과 창덕궁의 후원에 설치한 잠실을 내잠실(內蠶室)이라고 하였는데, 왕비는 그곳에서 친잠례를 행하였다. 조선후기의 친잠례에 대하여는 영조대에 편찬된 『친잠의궤(親蠶儀軌)』에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는 영조의 왕비 정성왕후 서씨가 경복궁 터에서 행한 친잠을 정리한 의궤이다.

조선전기에는 양잠을 크게 일으키기 위하여 전국에 잠실을 두었다. 한양에도 동잠실, 서잠실 등 몇 군데에 잠실을 두어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잠종(蠶種)을 잘 보존하여 양잠을 준비하게 하는 일도 수령에게 강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함경도 일대에 잠종을 보내어 양잠을 시험해볼 것을 지시하는 일도 있었다. 양잠을 진흥시키기 위해 뽕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이 중요하였는데, 이는 수령칠사의 하나인 ‘농상성(農桑盛)’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국가에서 도회처에 잠실을 설치하여 운영하는 일은 양잠을 보급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지만 이와 더불어 여러 가지 폐단이 나타났다. 잠실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유기(柳器) 등의 기물을 마련하는 것과 미두(米豆), 지지(紙地) 등을 조달하는 것이 모두 백성들을 동원하는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도회에 자리한 잠실을 폐지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궐내와 동서잠실에서 누에치기를 하는 일은 지속되었다.

내용

조선에서는 태종대에 양잠 기술을 보급하기 위하여 중국 원나라에서 만든 『농상집요』에서 양잠방(養蠶方)을 발췌하여 『잠서(蠶書)』즉 현전하는 『양잠경험촬요(養蠶經驗撮要)』를 편찬하였다. 전임 예문관 대제학이행(李行)이 『농상집요』 내용 중에서 요긴한 것을 뽑아내어 많은 효과를 거두자, 이를 국가적인 편찬사업으로 삼아 간행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한문으로 된 초록서를 그대로 간행하면 민간(民間)에서 한문을 해득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의정부 사인(舍人)곽존중(郭存中)으로 하여금 본국(本國) 이어(俚語) 즉 이두로 주석을 붙여 간행하게 하였다. 『양잠경험촬요』의 체재는 원문을 먼저 수록하고 이어서 행을 달리하면서 1자를 낮추어 이두 번역문을 기재하였다. 이두 번역문은 원문을 충실하게 번역하는 것보다는 읽는 사람이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부연, 번안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또한 세조대에는 양성지(梁誠之)가 주관하여 『잠서』가 편찬되었는데, 최종적인 책 제목은 ‘농잠서’였을 것으로 보인다. 1459년에 세조는 예문관 직제학서강(徐岡), 사헌부 감찰이근(李覲)에게 『잠서주해(蠶書註解)』를 편찬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 편찬 작업은 1459년 10월 양성지가 새로 편찬한 『잠서』를 세조에게 올리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세조는 중간에 자신이 직접 『잠서』 교정을 수행하려고 하였지만 쉽사리 할 수 없었다고 토로하기도 하였다. 이 작업은 이후 양성지에 의해 교정(校正)이 수행되었고, 결국 양성지가 1459년 10월에 『잠서』를 완성하였다. 그런데 1466년(세조 12)에 이르면 세조가 신숙주, 강희맹, 양성지 등에게 역(易), 천문(天文) 등에 관한 여러 서적을 골라 유취(類聚)하는 편찬사업을 실행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농상(農桑)도 정리 작업의 한 항목으로 들어가 있었다. 유취 편찬사업이 해당 분야에 대한 여러 책을 모아서 항목, 세목에 따라 정리하는 사업으로 생각된다는 점에서 1459년 양성지가 『잠서』를 편찬한 이후 계속해서 농상의 기술적인 부분을 정리하는 작업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1466년경에 『농잠서(農蠶書)』의 편찬이 완료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생활민속 관련사항

음력 3월을 잠월(蠶月)이라고도 부른다. 봄누에를 치는 시기라는 말로 보통 음력 3월이면 민가에서 뽕나무 가지를 치고 뽕잎을 딴다.

참고문헌

  • 이광린, 「『양잠경험촬요』에 대하여」, 『역사학보』28, 1965.
  • 이광린, 「『양잠경험촬요』 해제」, 『서지학』6, 1974.
  • 한영우, 「눌재 양성지의 사회·정치사상」, 『역사교육』17, 1975.
  • 남미혜, 「조선전기 양잠업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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