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응문(楊應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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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당시 조선에 파견된 명 측 인사들의 공로를 정하기 위해 파견된 명의 관료.

개설

1589년에 진사가 되었다. 이후 공과급사중(工科給事中)을 지내다가 1598년에 급사중서관란(徐觀瀾)을 대신하여 흠차사공형과도급사중(欽差査功刑科都給事中)으로 조선에 왔다. 그는 군대의 상황을 살피고 각 인물들의 공로를 평가했는데, 여러 인물 중에 특히 진린(陳璘)뿐만 아니라 형개(邢玠)와 만세덕(萬世德)·유정(劉綎)과 마귀(麻貴)의 공을 크게 보고하였다. 1604년 남경태복시소경(南京太僕寺少卿)에 올랐고 1609년 병으로 물러났다.

활약

정유재란 때 조선에 와서 전공을 정했다. 이에 앞서 1597년 12월에 있었던 울산 전투에서 크게 패배했던 양호(楊鎬)와 마귀는 형개와 회동하여 울산에서 크게 이긴 것으로 보고하고 죽은 병사 수를 줄여 보고하였다. 이에 대해 찬획주사(贊劃主事)정응태(丁應泰)가 울산성의 패전 소식을 사실대로 보고하자 공과와 전쟁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서관란이 파견되어 왔다. 서관란은 당시 정응태가 올린 탄핵 내용에 조선이 일본과 통한다는 내용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는 한편 심일관(沈一貫)·소대형(蕭大亨)·형개·만세덕이 함께 어울려 나라를 판 죄를 논하여 상소를 올리려 하였다. 그러나 심일관은 서관란이 병이 있다고 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니 결국 그의 보고서는 전달되지 못하였다. 이에 황제는 서관란을 대신해 다시 급사중양응문(楊應文)을 보내어 모든 군공을 정하게 한 것이다.

조선에 나온 양응문은 형개 등의 공적을 성대히 칭찬하였다. 양응문은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과 내통한다고 상주한 일에 대해 실상이 그렇지 않다고 보고하였다(『선조실록』 32년 2월 19일). 또한 심유경이 무뢰배라는 보고를 올리기도 했으며 조선에 파견된 관원들의 공적 조사에서 진린 다음으로 유정과 마귀를 수훈으로 올렸다. 그 외에도 동일원(董一元)이 도산 등 세 곳의 요새를 격파한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올리기도 했다. 양응문의 보고로 인해 형개와 만세덕 및 진린·유정·마귀 등이 각각 이에 상당하는 승급이 있었고 모국기(茅國器)·진인(陳寅)·팽우덕(彭友德) 등은 직산과 울산에서의 공으로 금을 하사받았다.

참고문헌

  • 『매호유고(梅湖遺稿)』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 『명신종실록(明神宗實錄)』
  •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 鄭潔西·楊向豔, 「萬曆二十五年的石星·沈惟敬案―以蕭大亨《刑部奏議》爲中心」, 『社會科學輯刊』, 遼寧省社會科學院,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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