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영만동보(梁永萬洞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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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북도 부령진에 속한 진보.

개설

양영만동보는 관방시설로 종9품인 권관(權管)이 맡았다. 토지가 비옥하였으나 백성을 지키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이 지역에서 잠상의 활동이 활발했으나, 중간에 폐지되어 폐보(廢堡)로 남아 있었다. 현종대 말에서 숙종대 초에 강변(江邊)으로 옮겨 새롭게 설치하였는데, 18세기 중반에는 성이 많이 허물어졌다고 한다. 현재, 북한의 국가지정문화재보존급 제487호로 지정되어 있다.

위치 및 용도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연려실기술』에는 양영만동보의 위치를 부의 북쪽 50리(약 20㎞)로 기록하고 있다. 『제승방략』에는 양영만동보의 위치가 부령진의 남쪽 40리(약 15.7㎞) 거리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양영만동보의 서쪽 25리(약 9.8㎞)에는 무산보(茂山堡)가 있으며, 북쪽으로는 풍산보(豐山堡)가 30리(약 11.8㎞) 떨어져 있다. 북쪽 60리(약 23.6㎞)에는 보을하진(甫乙下鎭)이 위치해 있었다. 현재 함경북도부령군창평리에 속해 있다.

변천 및 현황

양영만동은 토지가 비옥하여 사람이 살 만한 곳이었다. 하지만 보는 안에 있고 마을은 밖에 있어서 농민들을 보호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우의정유순정(柳順汀)은 무산보를 양영만동으로 옮기자고 건의하기도 했다(『중종실록』 2년 2월 28일). 당시 무산보가 침수되어 백성을 구제할 방법도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무산보를 옮기자는 의견이 나온 것이다(『중종실록』 2년 3월 3일).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지지』에 따르면 양영만동보성은 1513년(중종 8)에 돌로 쌓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무산(茂山)과 양영(梁永) 등지에서는 밀무역인 잠상이 활동하기도 했다. 국가에서는 이를 막았지만 완전히 근절시키기는 어려웠다(『선조실록』 33년 1월 26일). 1674년(현종 15)에는 양영에 진보를 설치하였는데, 『제승방략』에 따르면 토병(土兵)이 28명이고, 남쪽 지방에서 부방하는 군사가 50명이었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본래 부령(富寧)이 관할하던 폐양영보를, 1674년(현종 15)에 강변 만동구(萬洞口)로 옮겨 설치하였다. 토병의 본래 액수는 81명이었다.

『대동수경』 역시 양영만동보가 본래 부령부의 북쪽 50리(약 20㎞)에 있었으나 강희(康熙) 23년, 즉 1684년(숙종 10)에 무산으로 옮겼다고 하였다. 『대동지지』에 따르면 무산에 읍이 설치되면서 그 후에 무산부의 북쪽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하지만 나중에 폐지되었다. 결국 본래의 양영만동보는 부령부의 북쪽 50리에 있었으나 중간 어느 시점에 폐지되어 폐양영보로 불리고 있었다. 현종대 말에서 숙종대 초 사이에 이 양영보를 무산부의 북쪽 강변 쪽으로 옮겨 다시 설치하였다.

형태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대동지지』에 따르면 성의 둘레는 670척(약 203m)이고, 높이는 15척(약 4.5m)에 달한다. 『제승방략』에 따르면 양영만동보의 둘레는 1,154척(약 350m)이며, 여장(女墻)이 90곳, 옹성(甕城)이 2곳이며, 곡성(曲城)이 2곳이다. 천정(泉井)은 없지만 물을 끌어와서 연못에 저장할 수 있다고 했으며, 동문과 서문이 있다. 『여지도서』의 기록에 따르면 18세기 중반에는 거의 허물어져 있었다고 한다. 『조선향토대백과』에 따르면 양영만동성은 둘레가 630m로 동서가 약간 긴 방향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동문과 남문이 남아 있으며 성문 밖에는 옹성이 설치되어 있다. 서쪽과 북쪽 성벽 중간부에는 보루 터가 남아 있다고 한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제승방략(制勝方略)』
  • 『여지도서(輿地圖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대동수경(大東水經)』
  • 『대동지지(大東地志)』
  • 평화문제연구소 편, 『조선향토대백과』, 평화문제연구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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