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부(襄陽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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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양양 지방을 통치하였던 관아. 조선시대 양양 지방을 다스렸던 관청 및 행정기구.

개설

고려초기에 양양 지방은 익령현(翼嶺縣)으로 불렸다. 고려후기에 몽골의 침략을 당하여 공적을 세웠을 때 양주방어사(襄州防禦使)로 승격되었다. 이후 패전하자 덕령감무(德寧監務)로 강등되었다가 3년 후에 지양주사(知襄州使)로 회복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부(府)에서 도호부(都護府)로 개편되면서 양양도호부(襄陽都護府)로 명명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구려에서는 익현현(翼峴縣) 또는 이문현(伊文縣)이라 하였다. 신라에서는 익령(翼嶺)으로 고쳐서 수성군(守城軍), 즉 간성군의 속현이 되었다. 이렇듯 양양 지방은 고대사회에서 일정하게 지역공동체를 이루었다.

고려 건국 이후 양양 지방은 10도제에서 삭방도(朔方道)에 속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익령현(翼嶺縣)으로 현령(縣令)을 배치하였으며, 동산현(洞山縣)을 속현으로 두었다. 동산현은 고구려에서 혈산현(穴山縣)이라 하였는데, 신라에서 동산현으로 고쳐 명주(溟州)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현종 때 익령현에 귀속시켰다. 고려의 5도양계 체제에서 익령현은 동계(東界)에 속하였고,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의 통제를 받았다. 1178년(고려 명종 8)에 익령현은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에 속하였다. 1221년(고려 고종 8)에 익령현은 거란(契丹)의 군사를 방어하는 데 공을 세워 양주방어사(襄州防禦使)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1257년(고려 고종 44)에는 적에게 항복함으로써 덕령감무(德寧監務)로 강등되었고, 3년 후인 1260년(고려 원종 1)에 지양주사(知襄州使)로 회복되었다. 1263년(고려 원종 4)에 강릉도(江陵道)에 속하였다가 1388년(고려 우왕 14)에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에 속하였다.

조선 1397년(태조 6)에 임금의 외가 고을이라 하여 부(府)로 승격되었고, 1413년(태종 13)에 지방관제의 개편에 따라 도호부로 고쳐졌으며, 1416년(태종 16)에 양양도호부로 명명되었다. 1416년(태종 16)에 양주에서 양양으로 개명되고 도호부가 되었다. 1618년(광해군 10)에 사화(士禍)로 말미암아 양양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23년(인조 1)에 복호되었다. 1627년(인조 5)에 역란(逆亂)으로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37년(인조 15)에 복호되었다. 이 밖에도 읍호가 강등된 사실을 반영하는 양양현감이라는 용어가 쓰인 두 기사(『숙종실록』 22년 8월 29일) (『정조실록』 8년 5월 11일)를 통해 읍호의 강등과 복호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직 및 역할

조선초기에 부사(府使)와 교수(敎授) 각 1인을 배치하였다. 부사는 문관으로 종3품 당하관(堂下官)이나 정3품 당상관(堂上官)의 직이었으며, 그 예하의 향청(鄕廳)에는 좌수(座首) 1인, 별감(別監) 3인을 두었다. 6방(六房) 관속으로는 군관(軍官) 15인, 아전(衙前) 27인, 지인(知印) 16인을 두었다. 그리고 사령(使令) 19명, 관노(官奴) 25명, 관비(官婢) 25명을 두었다. 6방 관속은 읍치(邑治)에 세워진 각종 관아에 배속되어 업무를 분장하였다.

변천

1895년(고종 32)에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를 시행하면서 양양도호부는 양양군으로 바뀌어 강릉부 소속으로 편제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23부제를 폐지하고 13도제를 시행하면서 양양군은 다시 강원도에 귀속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관동읍지(關東邑誌)』
  • 『관동지(關東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강원도, 『강원도사』11, 강원도사 편찬위원회, 2015.
  • 강원도·양양군, 『양양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강릉대학교박물관,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