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군(梁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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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상남도 양산시 중부동과 그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양산군(梁山郡)은 신라의 삽량주(歃良州)에서 기원한다. 신라 경덕왕 때 양주(良州)로 개칭하여 한 곳을 영현(領縣)으로 두었다. 또한 광역 행정단위로 9주 중 하나인 양주의 치소가 위치한 곳으로도 중시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양주(梁州)로 개명하고, 방어사(防禦使)가 파견되었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서 양산군(梁山郡)으로 변경되었으며, 군수(郡守)가 파견되었다. 양산군은 임진왜란 직후 잠시 동래군(東萊郡)에 합병된 적이 있었으나, 1603년(선조 36)에 복구되었다. 조선시대에 양산군은 현재 경상남도 양산시 중부동과 그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양산군은 신라의 삽량주에서 기원하며, 신라 경덕왕 때 양주로 개명하였다. 당시 양주는 광역 행정단위인 9주의 하나를 의미하면서 그 주치(州治)가 위치한 고을을 지칭하기도 하였다. 고려의 후삼국통일 직후인 940년(고려 태조 23)에 양주(梁州)로 개칭하였으며, 1018년(고려 현종 9)에 방어사를 두었다. 고려후기에 밀성(密城: 현 경상남도 밀양시)에 소속되었다가 1304년(고려 충렬왕 30)에 복구되었다. 조선 건국 후인 1413년(태종 13)에 양산군이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양산군은 신라 경덕왕 때 양주로 개칭되면서 9주 중 하나인 양주의 주치가 위치한 곳으로 중시되었다. 양주에는 주의 장관인 도독(都督)이 파견되었으며, 양주는 헌양현(巘陽縣: 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을 직속의 영현으로 거느렸다. 고려시대에 양주(梁州)는 1018년(고려 현종 9)에 방어사가 파견되었다. 『고려사(高麗史)』「지리지」에 따르면, 양주에는 두 곳의 속현(屬縣)이 편제되었다. 고려시대에 양주에는 방어사가 파견되었지만, 그와는 별도로 읍사(邑司)가 설치되어 토착의 향리(鄕吏)들이 읍사에서 자치적으로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양주는 양산군으로 개명되고 지방관으로는 군수가 파견되었다. 고려시대와 달리 향리의 권한과 지위는 약화되고 양산군수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양산군에는 종4품의 군수와 종9품의 훈도(訓導)가 파견되었다. 조선후기에 편찬된 『양산군읍지(梁山郡邑誌)』에 의하면 양산에는 4품의 문관(文官)이 군수로 임명되며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를 겸하였다. 또한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2명, 향리(鄕吏) 8명, 서원(書員) 20명, 일수(日守) 15명, 장교(將校) 29명, 지인(知印) 20명, 관노(官奴) 25명, 관비(官婢) 9명, 사령(使令) 22명이 편성되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종4품의 군수가 임명된다는 내용이 있다. 조선시대에 양산군의 관아와 치소는 현재의 경상남도 양산시 일대에 위치하였다.

15세기의 자료인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양산군에 호수(戶數)가 425호, 인구가 937명이 있다고 기록되었다. 18세기 후반에 간행된 자료인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호수가 2,179호, 인구가 12,107명으로, 그 가운데 남자가 6,024명, 여자가 6,083명으로 기록되었다.

변천

1413년에 양산군으로 개칭한 이래 한동안 연혁의 변동은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양산은 큰 피해를 입었다. 동래에 합병되었다가 몇 년이 지난 1603년(선조 36)에 다시 분리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그대로 양산군으로서 동래부의 관할에 속했다.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양산군은 경상남도 관할의 4등군으로 편제되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양산군읍지(梁山郡邑誌)』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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