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방형(楊方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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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5년 임진왜란 당시 명이 일본과 강화를 위해 파견한 사신 가운데 한 명.

개설

강화를 통해 일본과의 전쟁을 끝내기로 결정한 명은 풍신수길(豊臣秀吉)을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는 사신 파견을 결정하였다. 이때 일본으로 향하는 사신의 부사로 차출된 인물이 양방형이다. 1596년 4월 4일 정사이종성(李宗城)이 부산에 있던 일본군 진영을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명 조정은 양방형을 정사에 임명하였다. 양방형은 일본으로 건너가 풍신수길과 강화를 위한 회담을 가졌지만, 명과 일본이 원하는 것에 차이가 있어 강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일로 결국 그는 탄핵을 당하였다.

가계

양병형은 지금의 중국 곡정시(曲靖市) 기린구(麒麟區)인 운남성(雲南省) 남녕현(南寧縣)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양조(楊遭)이다.

『상촌집(象村集)』에는 양방형의 호를 태우(泰宇),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는 공우(恭宇)로 기록하고 있다. 그의 이름 역시 『선조실록』에는 ‘楊方亨’ 외 ‘楊邦衡’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김시형(金時讓)의 『자해필담(紫海筆談)』에는 ‘楊邦衡’, 조엄(趙曮)의 『해사일기(海槎日記)』에는 ‘楊芳亨’으로 기록되어 있다.

활동 사항

1595년 4월 양방형은 흠차책봉일본부사(欽差冊封日本副使)좌도독부서도독첨사(左都督府署都督僉事)로 임명되어 조선에 왔다. 정사이종성보다 먼저 일본 진영으로 향한 양방형은 거창에 도착하자 심유경에게 일본군의 철수를 재촉했다(『선조수정실록』 28년 7월 1일). 하지만 일본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군 진영에 도착한 뒤에도 그는 소서행장(小西行長)에게 일본군이 철수하지 않으면 강화가 성립되지 않을 것임을 명백히 밝혔다[『선조수정실록』 28년 11월 1번째기사].

정사인 이종성이 일본군 진영을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모두 놀라는 가운데 양방형은 명인과 일본인 모두를 안심시켰다. 명 조정은 양방형을 정사, 심유경을 부사에 임명하여 일본과의 강화를 계속 추진하였다. 일본으로 향한 양방형은 1596년 9월 1일 풍신수길을 만나 명 황제의 임명장·금인·관복 등을 전달했다. 하지만 명과 일본의 요구조건이 상반되어 강화회담은 결렬되었다.

1597년 1월 명에 돌아간 후 양방형은 강화의 전말을 명에 알리면서 잘못은 모두 심유경에게 있는 것으로 보고하였다. 그 결과 심유경은 체포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재침이 있자 양방형 역시 처벌받았다.

학문과 사상

양방형이 일곱 살 되던 해에 부친이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자, 시를 써서 누명을 벗겼다고 한다. 12세에는 독학사자(督學使者)의 추천으로 동자시(童子試)에 응시하여 동자거인(童子舉人)이 되었다. 이후 박사(博士)라는 칭호를 받아 진강(鎭江)의 교수(教授)로 임명되었다. 1598년에는 국자감(國子監) 조교(助教)를 지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양방형의 학문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상훈 및 추모

『선조실록』을 편찬한 사관은 양방형에 대해 자만하기는 하지만 처사가 부드럽고 거동이 망령되지 않다고 평가하고 있다(『선조실록』 29년 5월 9일). 하지만 양방형이 거느린 수행원은 2,000여 명에 이르렀고, 때문에 그를 접대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국가의 기반이 흔들린다는 지적도 나왔다(『선조실록』 30년 1월 23일). 즉 조선인들은 양방형을 긍정적으로 보기도 했지만,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왔던 다른 명인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많은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1615년 양방형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학생들은 크게 슬퍼했으며, 명 신종(神宗)은 친히 정려(旌閭)했다고 한다.

참고문헌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 『서애선생문집(西厓先生文集)』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