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진찬(夜進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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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시간에 거행하는 궁중의 연향 의례.

개설

야진찬의 ‘야(夜)’는 연향이 밤에 베풀어졌다는 것을 이르고, ‘진찬(進饌)’은 진연(進宴)보다는 규모가 작고 진작(進爵)보다는 큰 연향을 이른다. 진찬이라는 용어는 영조대에 ‘조촐하게 마련하여 올리는 잔치’라는 의미로 쓰였으나 이후 진연보다 규모가 작은 예연(禮宴)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연원 및 변천

『조선왕조실록』에서 야진찬의 명칭이 처음 보이는 것은 순조대부터이다. 1829년(순조 29) 2월 창경궁에서 순조가 40세 되는 동시 재위 30년이 되는 것과 순조 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의 사순을 기념하기 위한 잔치에서 야진찬을 설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1829년의 야진찬은 창경궁의 자경전(慈慶殿)에서 순원왕후를 위해 열렸는데, 이때에는 포구락(抛毬樂)·무고(舞鼓)·춘앵전(春鶯囀)·검기무(劍器舞) 등의 궁중 정재(呈才)가 연행되었다. 이후 1848년(헌종 14) 3월에는 통명전(通明殿)에서, 1877년(고종 14) 12월에는 통명전과 만경전(萬慶殿)에서 야진찬이 열렸으며, 1902년(광무 6) 고종의 망육(望六) 즉 51세가 되는 해를 맞아 기로소에 입소하는 것을 기념하는 해에도 야진찬이 거행되었다. 진찬, 내진찬(內進饌) 등은 낮 시간에 베풀어지지만 야진찬은 밤에 열리기 때문에 그 기록을 통해 밤 시간에 거행하는 연향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절차 및 내용

의례를 거행하는 순서는 시기별로 다소 차이가 있지만 큰 틀에서는 유사하다. 먼저 왕, 왕비, 대왕대비 등이 연향이 행해지는 장소로 들어와 각자의 자리에 이르면 4번 절하는 사배례(四拜禮)를 행한다. 휘건을 드리는 진휘건(進揮巾), 꽃을 올리는 진화(進花) 절차가 이어지고 잔치를 치하하는 의미를 담은 치사(致詞)를 올린다. 이어 제1작(爵)부터 제5작, 제7작 등 잔치의 규모에 따라 차등화시켜 올리는 술과 술을 올리는 사이사이에 궁중 정재를 연행한 후 끝부분에서 다시 4번 절하는 사배례를 하며 의례를 마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술은 음식과 함께 올리며, 정재를 연행할 때에는 음악 반주가 수반된다.

참고문헌

  • 『순조기축진찬의궤(純祖己丑進饌儀軌)』
  • 『고종정해진찬의궤(高宗丁亥進饌儀軌)』
  • 『임진진찬의궤(壬辰進饌儀軌)』
  • 『임인진연의궤(壬寅進宴儀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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