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양보(靉陽堡)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시대 요동 지방에 설치한 명나라의 군사시설인 진보.

개설

명은 요동 지방에서 여진족이 침입하는 것을 대비하여 요충지를 중심으로 진보 방어체제를 구축하였다. 애양보는 여러 진보들 가운데서도 조선의 압록강과 가장 가까운 곳에 설치된 진보였다. 애양보는 이후 여진족이 성장하여 명을 공격할 때 주요한 공격 지점이 되었다.

위치 및 용도

정확한 위치는 확인할 수 없으나, 명과 여진이 충돌하는 군사적 요충지에 설치되어 있었다. 1470년(성종 1) 성절사(聖節使)의 통사(通使)였던 최유강(崔有江)이 보고 들은 일들을 보고하였는데 대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명이 요동에서부터 조선의 국경까지 긴 담[長墻]을 쌓고 5개의 보를 설치하여 군인을 두고 방어하고 있었다. 첫째는 동주보(東州堡)인데, 요동과의 거리는 이틀 길이고, 수호(守護)하는 군대는 정군(正軍)이 700명, 여정(餘丁)이 700명이나 되었다. 둘째는 마근단보(馬根單堡)인데, 동주보와의 거리가 이틀 길이고 군사의 수는 동주보와 같았다. 셋째는 청하보(淸河堡)인데, 마근단보와의 거리가 하루 길이고, 군사의 수는 같았다. 넷째는 감양보(鹻陽堡)인데, 군사의 수효는 또한 같았다. 마지막으로 다섯째가 애양보인데, 조선의 창성(昌城)과 서로 마주 보고 있으며, 감양보와 거리가 하루 길이고 수호하는 군대는 정군이 1,000명, 여정이 1,000명이었다. 긴 담은 동주(東州)부터 감양(鹻陽)에 이르기까지는 혹은 돌로 쌓기도 하고 혹은 흙으로 쌓기도 했으며, 감양으로부터 애양에 이르기까지는 벽돌로 쌓아 있었다. 5보 군사의 급료는 요동에서 운반하여 공급했는데, 금년부터는 5보에서 모두 둔전으로 군사의 식량을 공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성종실록』 1년 1월 13일). 이 기사로 볼 때, 애양보는 요동 5진보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한 진보였으며, 군사적 중요성이 높았기 때문에 주둔하는 군사의 수도 가장 많았다.

변천 및 현황

정군 1,000명과 여정 1,000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애양보 인근에는 돌로 쌓은 높은 담이 설치되어 있었다. 애양보에는 둔전을 설치하여 군인들의 식량을 자체적으로 조달하였다. 애양보는 1620년(광해군 12)까지도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지만, 이후 건주여진이 요동을 정복하고 명까지 멸망시키면서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관련사건 및 일화

1477년(성종 8) 건주위 야인이 삼위달자(三衛達子)와 연합하여 요동을 공격하자 지휘(指揮)유총(劉聰)이 군사를 거느리고 애양보로 출진(出鎭)하였다가 적을 만나서 전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애양진은 조선과 매우 가까워 압록강이 얼자 적이 우리나라 변경에 침입할 것이 우려되었다. 이에 성종은 평안도절도사 성귀달(成貴達)과 영안남도절도사 김교(金嶠)·영안북도절도사 정난종(鄭蘭宗)에게 명하여 경계를 엄하게 하고 방어체제를 유지할 것을 지시하였다(『성종실록』 8년 10월 22일).

참고문헌

  • 『만기요람(萬機要覽)』
  • 강석화, 「조선후기 평안도지역 압록강변의 방어체제」, 『한국문화』34,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4.
  • 고승희, 「조선후기 평안도지역 도로 방어체제의 정비」, 『한국문화』34,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4.
  • 이철성, 「17세기 평안도 ‘강변 7읍’의 방어체제」, 『한국사학보』13, 고려사학회, 2002.
  • 임성수, 「18세기 평안도 진보재정의 운영과 변화」, 『한국사학보』46, 고려사학회, 2012.

관계망